이순신 - 01 (01~05)

1

아무리 전라 좌수영이 남쪽 끝이라 하여도 이월이면 아직도 춥다.
굴강(병선을 들여 매는 선창) 안에 있는 물은 잔잔해서 마치 봄빛을 보이는 것 같지마는 굴강 밖에 만나서면 파란 바닷물이 사물거리는 물결에서는 찬 기운이 돌았다.
굴강 안에는 대맹선(大猛船) 두 척, 중맹선 육척, 소맹선(小猛船) 이척, 무군 소맹선(小猛船) 칠척, 도 한 십 칠척이 배가 매여 있다. 그러나 명색은 갖추었어도 배들은 반 넘어 썩고 이름 모를 조개들만 제 세상인 듯이 배들의 가슴과 옆구리를 파먹느라고 다닥다닥 붙어 있다. 법으로 말하면 병선은 새로 지은 지 팔년 만에 한 번 중수해야 하고 그로부터 육 년 만에 개조해야 하고 또 그로부터 육 년 만에는 낡은 배는 내어 버리고 새 배를 지어야 하건마는 차차 법이 해이하여 일년 이차 뱃바닥을 굽는 것(배를 매여달고 그 밑에 불을 피워 뱃바닥 창널을 그슬리는 것)조차 벌제위명(伐齊爲名)이 되고 말았다.
금년(신묘년) 정월, 새 수사(水使) 이순신(李舜臣)이 도임함으로부터 배와 군사는 전부 엄중한 점고를 받아서 쓸 것 못 쓸 것을 가리어 놓게 되었다.
수군 오백 팔십인 중에 정말 쓸 만한 것은 삼백인도 못되고 그 나머지 이백 팔십여 명 중에 백여 명은 나이 육십이 넘어 군사 노릇 못할 늙은이들이요, 그 밖에 일백 팔십여 명은 이름뿐이요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 이러하니 병기는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저 굴강 안에 있는 썩은 배에 들러붙은 사람들은 신관 사또 도임 후에 배를 고치는 목수들이다. 「쓱쓱...」하는 톱질 소리, 「떵떵떵떵......」하는 못 박는 소리, 뱃바닥 굽는 화롯불 연기.
그리고 저 바로 복 파정(伏波亭앞 넓은 마당에 가로놓인 괴물이야말로 새 수사 이순신이 몸소 도편수가 되어서 짓는 맨 처음 거북선이다.
선조 신묘 이월(宣祖辛卯二月)!
이것은 세계 최초의 장갑선(배를 윗집으로 덮어서 사람이 밖에 드러나지 아니하고 윗집 밑에서 활동하게 만든배)인 조선 거북선이 처음으로 지어진 심히 영광스럽고 기념할 만한 달이다.
「땅 땅땅땅......」복 파정 앞에는 까뀌 소리, 끌 소리, 톱 소리, 못 박는 소리...... 실로 기운차고 바쁘다. 청홍동달이 소매 좁은 군복에 홍 전복을 입고 옥로. 금패. 패 영단 전립을 쓴 아랫수염 길고 키는 중키요. 얼굴 희고 눈초리 약간 위로 올라가고 콧마루 서고 귀 크고 두터운 사십 오륙 세의 장관. 그는 물어 볼 것 없이 정읍 현감(井邑懸監)으로 있다가 우의정(右議政) 류성룡(柳成龍) 의 천으로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가 되어 지난달에 도임한 이 순신이다.
이 수사는 뒷짐을 지고 지어지는 중에 있는 거북선 가으로 돌아다니면서 이리 보고 저리보고 친히 지휘를 하고 있다. 배는 거의 다 완성이 되어 앞으로 십여 일이면 손을 뗄 예정이다. 그래서 아무리 늦더라도 삼월 십오일에는 요샛말로 이르면 진수식을 할 작정이었다.
벌써 배는 거북의 모양을 거의 이루었다. 아직 눈알은 박지 아니 하였으나 길이가 사척 삼촌. 넓이가 삼척이라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키 적은 사람 둘을 가로 놓은 듯한 거북의 머리도 이제는 완성이 되고 그 등의 귀갑무늬도 반이나 그려졌다.

2

이 수사는 흉물스럽게 딱 벌린 거북의 입을 바라보고 마음에 드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제 저 입에다가 유황 염초 불을 피워서 그름 같이 연기를 피우적진중으로 달려 들어가 그 입으로 불길과 포환을 뿜어.〉하고 수사는 자신 있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저 배도 뜰까?』
사람들은 새 수사의 계획에 의심을 가졌다. 첫째는 그 배가 너무 큰 것.
둘째는. 그 배에 쓰는 널이 너무 투박한 것. 셋째는. 대관절 저런 흉물스러운 배는 해서 무엇하느냐 하여 그 용처를 모르는 것.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 그중에도 물에 이고 배에 익다는 사람들이 뒷구멍으로 수사의 어리석은 계획을 비웃었다. 병선이면 예로부터 대맨선도 있고 중맹선도 있고 소맹선도 있지 아니 하냐 이러한 좋은 배들도 다 쓸 데가 없어서 법수에 배여서 썩는 판인데 저런 만나 역대에 보지도 못하던 배는 지어서 무엇하느냐 하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수사의 부관이라고 할 김 우후( )까지도 감히 인밖에 내어서 말은 못하나 경험 없는 수사의 철없는 장난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아니하고. 만일 새로 짓는 배가 불성공이 되면은 비밀히 자기와 척분 있는 병조 판서에게 보고하여 한번 신 수사 이순신이 떨어지는 양을 보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 수사는 남들이야 무엇이라고 비웃든지 공사만 끝내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배 짓는 감독을 몸소 하였다. 다행히 도편수 한 대선은 수사가 정읍에 있을 때부터 사귀어서 여러 번 거북선 모형을 만들게 한 수사의 뜻을 잘 알아 들엇 이를테면 수사의 유일한 동지라 할 것이요. 그 밖에 수사의 병선 신조.
수군 대혁신의 정신을 알아주는 사람으로 바로 이 수사의 부하 되는 전라 좌수영 군관 송 회립(宋烯立)과 녹도 만호(鹿都萬戶) 정 운(鄭運)이 있을 뿐이었다. 군관 송희힙은 본래 순천부 사람이었다. 나이 오십이 가까웁되 본래 시골 사람이서 죄수영 군관 이상에 오를 수가 없었다. 역대 수사나 우후 중에 송희립을 별로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이번 수상 이 순신은 도임한 지 며칠이 아니 되어서 군관 송희립이 녹록한 사람이 아닌 것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녹도 만호 정운도 만일 서울에 반연을 둔 사람일진댄 벌써 병사나 수사 한 자리는 할 만한 인물이요. 이 순신도 꽤 푸대접받은 사람이지마는 그래도 그에게는 류 성룡과 같이 알아서 천해 주는 사람이 있었지마는 전혀 서울에서 끌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또 천성이 개결하고 자부가 자못 높아서 남의 앞에 무릎을 굽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오십 평생을 권관(權管). 만호(萬戶)로만 돌아다니고 첨절제사(僉節制使).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한 자리 얻어 하지 못하였다.
이 녹도 만호 저 웅니 이 수사의 눈에 띄게 된 것은 이 수상가 새로 도임하여 관하 각 진을 순회할 때에 녹도진의 병선. 군사. 군기가 가장 정제한 것을 발견한 데에 있었다. 이때에 중앙과 지방을 물온하고 위로 정승 판서로부터 밑으로는 외방 말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속속들이 부패하여서 빙공영사(憑公營私)로 일을 삼음으로 사만 팔천 팔백 수순. 오천 구백 육십 조졸(漕卒).팔백여 병선이라고 하여도 명색뿐인 중에 정 운 같은 장수를 만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3

신묘 삼월!
이날은 조선의 거북선이 처음으로 물 위에 나 뜨는 날이다. 정월 보름에 기공하여 만 이 개월 반을 허비해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전고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거북선이란 것이 물에 나 뜨는 것을 보자고 좌수영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인근 제읍에서도 많이 구경을 하려 모여 들어서 좌수영에는 이날에 수만 명 사람이 북적하였다. 이날은 늦은 봄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더웠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날을 축하하는 듯이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새로 지은 산더미 같은 거북선에는 이물. 고물이며. 죄현. 우현에 고색기를 달아서 그 깃발들이 기운차게 바람에 펄렁펄렁거렸다.
북파정에는 수사. 우후. 조방장. 오위장. 군관. 각 읍 수령. 첨사. 만호.
도위들이 가기 군복 전힙에 칼 차고 전통 지고 위의 갖추고 죄정하였고.
굴강(방파제)에는 오백명 수군이 새로운 군복을 입고 가슴에 달덩어리 같은 수군패를 붙이고 행렬 지어 벌여 서고 굴강. 법수에 매여 있은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들도(가 진에서 첨사 만호들이 타고 온 배를 합하여 삼십여 척이었다) 모두 깃발을 날리고 명령을 기다리고 섰다.
좌우영 속한 육읍 칠진의 병선들도 새 수사의 엄명으로 조금씩이라도 다 주옥을 하였었다. 그중에도 녹도진 병선들은 죄수영 병선에지지 아니하게 깨끗하고 새로웠다. 구경군들은 돌산도 대섬(지금 장군도)의 모든 산에까지 하얗게 둘러 섰다. 하늘은 푸르고 수름은 희었다. 오정이 되어 봄 바다의 사리물이 앞바다에 두둑하게 올리어 밀었다.
이때에 쿵하고 큰 북소리가 울리자 쾅하는 아단 단지(폭발탄 같은 것)가 터지고 그 속으로서 무수한 화전이 나와서 공중에 샛별같이 떠돌았다. 이 화전도 새 수사가「귀동이」「달쇠」두 사람을 시켜서 크게 개량한 것이니. 이것으로 첫째는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둘째로는 적선에 불을 놓자는 것이다.
이 북 소리와 아단 단지 소리를 군호로 도편수 한 대선이 거북선을 잡아맨 줄을 끊고. 오백명 군사의 손에 벌이 줄이 끌려서 산 같은 거북선으로부터 요란한 소리와 용이 오르는 듯한 큰 물보라를 내면서 그 위대한 뱃바닥을 물 속에 집어넣었다. 이 순간. 복파청에 모인 수사이하 삼십 명 장수들과 천여 명 군졸들은 기약하지 아니하고 일제히 「으아」하고 고함을 쳤다. 그리고는 그 고함을 따라 군악이 일어나고 군악과 고함 소리 속에 조영도감인 우후 김 운규(金雲珪)가 앞장을 서고 수사 이순신이하 부사. 첨사. 위장. 현감. 만호 등 제장이 뒤를 따라서 다릿널을 밟고 거북선으로 올라 갈 적에 그 위엄이 비길 데가 없었다.
제장이 다 배에 오르고 일백 육십 명의 수군이 올랐다. 대맹선에 군사 팔십 명.
중맹선에 군사 육십 명. 소맹선에 군사 삼십 명인데. 거북선에는 장수 외에 군사 일백 육 십 명이다. 그중에서 사십 명은 노를 젓는 사람이요. 이십 명씩 두패에 갈라서 번갈아 이십 노를 젓고 칠십이 명은 거북선 칠십이 포혈에 한 구멍씩을 맡고 삼십 육명은 포수의 번을 가는 사람이요. 나머지 십 이 명은 밥을 짓고 배를 소제하고 기타 잡역을 하는 군사다. 군사들은 모두 통 좁은 바지와 긴 저고리를 입고 저고리 위에 둥달이 적삼을 걸치고 옷빛은 바닷물과 같은 푸른 빛이다.
그리고 머리에 검정 벙거지를 썼다. 그리고 가슴에는 소속한진(鎭) 명과 성명과 생년과 주소를 쓰고 한문 글자로「水軍」두 자를 전자로 새긴 화인을 찍은 둥군 목패를 찼다.

4

이렇게 수백 명 사람이 올라 탔건마는 밖으로 보기에는 거북선은 테텡 빈 듯하였다 그 무서운 쩍 벌린 . 거북의 아가리. 오직 그것만 생명이 있어서 금시에 무슨 요란한 소리를 지를 듯하였다.
사람들의 눈을 실로 이 괴물에게로 못 박힌 듯이 향하였다. 이윽고 거북선의 아가리로써 「우후후」하는 산과 바다가 진동하는 듯한 길고 흉물스러운 소리가 나며 그 뒤를 이어 시커먼 연기가 나오고 또 그 뒤를 이어서 콩 하는 대완수 소리와 함께 아름드리 불길이 확 나오더니 무수한 화전(花煎)이 살별과 같이 해상과 공중으로 쏟아져 나갔다. 그러자 좌우에 뻗은 이십 개의 노가 일시에 물을 당기니 「저것도 물에 뜨나」하던 크나큰 거북선은 바람과 물결을 한꺼번에 일으키며 굴강을 벗어나 그야말로 살같이 앞바다로 내달았다.
대맹선. 중맹선들이 있는 힘을 닿여 거북선의 뒤를 따라 오나 마치 젖먹이와 날랜 어른과의 경주와 같았다. 거북선은 둥둥 울리는 선장(선장)의 북 소리를 따라서 마치 자유로 날아 돌아가는 갈매기 모양으로 좌수영 앞바다를 몇 바퀴를 돌았다. 처음 그를 따르려던 병선들은 저 뒤에 떨어져서 거북선이 화전같이 돌아가는 것을 구경하고 섰을 뿐이었다. 사방 산에 돌아선 구경하는 백성들은「야아.야아」하고 경탄하고 환호하는 소리를 질렀다.
이때에 어떤 장수 하나가 거북선의 등인 갑판 위로 쑥 올라 섰다. 육지에 있는 사람으로는 그 얼굴은 볼 수 없지마는 또 새 사사 이순신을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도 그것이 이 수사인 줄을 번개같이 알았다. 그리고 이러한 무섭고 신통한 물건을 지어 내인 이 수사는 필경 신인이요.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거북선을 칭찬하고 그것을 만들어 내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순박한 백성들 뿐이다. 우후 김 운규 이하로 한애비. 외한애비. 외한 애비의외한 애비. 이 모양으로 조금이라도 서울에 조정이라고 일컫는 곳에 등을 대인 사람들은 거북선. 그것을 만든 사람까지 자기네가 못하는 일을 한 사람이 밉고 따라서 아무 마음도 없는 거북선까지도 미웠다. 그놈의 거북선이 오늘에 물에 잘 뜨지를 아니했거나. 또는 생각하였던 모양으로 너무 비둔해서 속력이 빠르지 못하였던들 대단히 기뻐할 사람도 없지 아니하였다.
『사또. 이런 것이 스무척만 있으면 왜는커녕 천하에 무서울 것이 있겠소?』
하고 취한 듯이 기뻐하는 것은 정충보국(貞忠報國)이라고 칼에 새겨 가지고 다니는 녹도 만호 정운 기타 몇 사람이었다. 그 밖에는 첨사니 만호니 부장이니.
이름은 군직이라 하더라도 아마 대장이니 절도사니 하는 축들도 대관절 주사(舟師)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가 몇이 못될 것이다.
거북선 한 척이 한 편이 되고 다른 사십여 척 병선이 한 편이 되어서 대수조를 거행하게(大水繰) 되었다. 북 소리와 거북선의 소랏소리와 각 배에서 울어나는 방포 소리에 천지가 흔들리고. 유황 엽초의 연기는 백일을 가리워 빛이 없게 하였다. 더구나 거북선 칠심이 포혈에서 일시에 방포가 될 때에는 그야말로 산과 받가 일시에 흔들리는 듯하였다.

5

사십여 척 병선이 다 합하더라도 거북서 하나의 위력을 당하지 못할 것은 물론이다. 첫째로. 거북선은 속력이 다른 배의 세 갑절이 되고. 둘째. 거북선은 군사를 다 가리웠으매 내가 남을 쏘아 죽이기는 해도 남이 나를 쏘아 죽일 수는 없고. 셋째. 거북선은 전후 좌우에 칠십 이포혈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일시에 방포를 하고 활을 쏘면 전선이 도시 불이요 화살이어서 적선이 감히 접근할 수가 없고. 넷째. 원체 체대가 큰 데다가 배를 지은 재목이 든든하고 배의 중요한 는 철갑을 쒸웠기 때문에 적선과 마주 부딪치면 나는 성하고 적선은 부서지고. 다섯째. 바람의 힘을 빌지 아니하니 돛대가 필요 없고 갑판에는 철판을 덮고 날카로운 못을 수 없이 거꾸로 박았으니 적이 아무리 불을 놓으려 하더라도 불을 놓을 수가 없을 뿐더러. 비록 적병이 배에 뛰어 오르려 하더라도 뛰어 오르는 대로 쇠못에 꿰어 죽게 되고. 여섯째. 입으로 연기를 토하여 몸을 감추고. 일곱째. 배가 크기 때문에 물과 양식을 많이 실어서 오래 항행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배는 그때에 있어서는 동양 서양을 물론하고 다시 없는 것이었다.
이제 거북선의 제도를 잠깐 보자!
밑판이 열 쪽에 길이가 육십 사척 필촌이요. 머리 넓이가 십 이척이요. 허리 넓이가 심 척 오촌이요. 꼬리 넓이가 십척 육촌이요. 좌우 삼판이 각각 일곱 쪽을 모아서 높이가 칠척 오촌이요. 맨 밑에 쪽의 길이가 육십 오 팔척이요. 위로 올라갈수록 차차 기어져서 맨 위인 일곱째 쪽의 길이가 일백 십삼척이요 두께는 모두 사촌이요. 노판(이물)이 네 쪽을 모았으니 높이가 사척이요. 둘째 판에는 좌우에 현자(玄字) 포혈 하나씩을 뚫었고 축판(고물)이 일곱 쪽을 모았으니 높이가 칠척 오촌이니 위의 넓이가 십 사척 오촌이요. 아래 넓이가 십척 육촌인데. 여섯째 한복판에 직경 일척이촌 되는 구멍을 뚫어 키를 꽂게 하였다. 좌우 삼판에는 세인막기(난간)를 만들고 세인막 이 머리에 멍에를 걸고 바로 이물 앞에는 말이나 소의 가슴패기 모양을 세인막 위에 연하여 판장을 깔고 패를 둘러 박고 패위에 누인막이라는 난간을 거니 삼판에서 누인 막까지가 높이가 사척 삼촌이다 . 누인막이 좌우에 각각 판장 열 한 쪽을 바늘을 달아 덮고. 등에 편하게 하였다. 이물에는 거북의 머리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사척 삼촌이요. 넓이가 삼척이다. 그 속에 유황과 염초를 피워 입을 벌리고 내를 토하면 안개와 같아서 적으로 하여금 내 몸을 보지 못하게 한다.
좌우에 노가 각각 열이요. 좌우 패에 각각 포혈 둘을 뚫고 아래에 문 둘을 내이고 문 곁에 각각 포혈 하나를 내이고 좌우 개판에도 각각 포혈 십 이를 내었다. 좌우 마루 밑에는 각각 방 십이간이 있으니. 이간에는 철물을 두고 삼간에는 화포. 활. 살 . 창. 검을 갈라 넣고 나머지 십구간은 군병이 쉬는 곳이다. 왼편 마루 위에 있는 방 간에는 선장(船將)이 거처하고 우편마루 위에 있는 방 한 간에는 장교가 거처하게 되었다.
군병들은 쉬일 때에는 마루 밑에 내려 가고. 싸울 때에는 마루 위에 올라간다.
포혈마다 화포가 있어서 쉴새 없이 재어서 쏘게 되었다. 그리고 등에는 거북 무늬를 그려 바다에 뜨면 물결고 흡사하게 보이고 앞가슴에는 닻을 매었다.
좌우에 도합 스무 노를 사십 명이 번갈아 저으면 하루에 족히 오백리를 갈 수가 있었고 가까운 거리에서 전속력으로 저으면 마치 화살과 같이 빨랐다.

이순신 - 01 (06~08)

6

『어. 과연 장하오. 사또는 신인이시오.』
하고. 수조가 다 끝난 뒤에 순천 부사가 이 수신에게 인사말을 하였다.
『거북선 스무척을 지어 놓은 뒷면 왜 병이 오더라도 염려가 없겠소마는.』
하고. 수사는 배에서 복파정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고개를 돌려 거북선을 바라보며.
『그리할 동안이 있을는지 알 수 업소.』
하고. 쇠북 개목으로 멀리 동해를 바라보았다.
『웬걸 왜병이 올라구요. 김 성일(金誠一)의 말을 들으면 평수길은 큰일을 할 위인이 못되더라는 걸요.』
하고. 순천 부사 심유성이 선견지명을 자라하는 듯이 말하였다. 그것은 풍신수길(풍신수길)의 위인과 그의 뜻을 염탐하러 보냈던 사신 황 윤길(황윤길)과 김 성일(김성일)과의 복명한 말을 가리킨 것이다. 황 윤길은 말하기를.「풍신수길은 눈에 정기가 있고 비범한 인물이니 반드시 큰뜻을 품어 조선을 엄습할 근심이 있다」하고. 김 성일은 그와 반대로. 「풍신수길은 누이 쥐눈같고 외모로 보나 언행으로 보나 하잘 것 없는 위인이니 족히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정사인 황 윤길의 말과 부사인 김 성일의 말이 이렇게 엄청나게 틀리니 조정에서는 그 어느 말을 믿을 바를 몰랐다. 그래서 동인들은 (유 성룡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김 성일의 말이 옳으니 군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서인들은 황 윤길의 말이 옳으니 그 말을 믿어 수륙의 군비를 일으키자고 하였다. 이렇게 어전 회의에서 끝날 줄 모르는 말다툼을 하였다. 대세르 보기에 어두운 왕은 처음에는 황 윤길의 말을 믿어 일본이 내습할 것을 가상하고 해군과 육군을 일으키기를 결심하였으나 다시 동인들의 말에 기울어져서 단연히 수륙 군비를 아니하기오 결정하였다. 이래서 김 성일은 심부름 잘 하였다. 하여 상을 받고. 황 윤길은 공연히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하여 왕에게 크게 꾸지람을 받았다. 순천 부사 심우성은 서인이었다. 그는 동인인 류 성룡의 추천을 받아서 수사가 된 이 순신의 하는 일을 고게 볼 리가 없었다.
순천 부사 심유성은 대수조를 마치고 순천으로 돌아온 길로 호군(護軍) 신입(申砬)에게 이 순신의 거북선과 및 순신이 거북선 이십척을 건조할 계획을 가졌다는 말을 보고하였다. 신 입은 이 보고를 받아 가지고 몇몇 서인의 선배들의 의향을 들은 후에 이 순신으로 하여금 큰 공을 이루게 함은 성룡 일파에 세력을 중징함이라 하여 단연히 순신의 수군 대확장. 특히 성공이미지수인 거북선 건조를 금지할 것을 왕에게 지언하였다. 이때에 서인 중에서도 윤두수(尹斗壽). 이 항복(李恒福) 같은 이들은 이 순신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억제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구태여 규각을 내어서 반대하기도 원치 아니하였다. 왕은 신입의 「청컨댄 주사를 파하고 육군에만 힘을 쓰게 하소서(請罷舟師專意陸戰)」이라는 계사를 받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때에 마침 왕은 이 순신의 장계를 받아 거북선의 그림과 아울러 그 시험 성적을 보고 혼자 기뻐하던 때인 까닭이다. 이렇게 좋은 거북선을 왜 없이 하라는가. 적이 바다로 오거든 어찌하여 주사를 폐하라고 하는가. 이에 대하여 왕은 의심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7

신입 및 그 당파들이 수군을 폐하자는 논리는 이러하였다.
『지금 묘의가 군비를 파라기로 하였거늘 쓸데없이 수군을 확장해서 일본뿐 아니라 명나라에게 까지 라도 의심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하나요. 또 설사 일본이 침입한다 하더라도 일본은 사방을 바다로 두른 섬나라여서 백성이 모두 물에 일이므로 도저히 수전을 일병을 막기가 어려우니 차라리 육지에 끌어 올려서 대번에 씨도 없이 부서 버리는 것에 상책이라는 것이 둘이니. 이 두 가지 이유로 수군을 확장할 필요가 없을 뿐더러 있던 것도 파해 버리고 오직 육전에만 전력을 하자.』
는 것이었다 여기는 동인들을 . 빈정대는 뜻이 많이 품겨 있었음은 물론이다.
왕은 어느 말을 좇을 바를 몰랐다. 그는 심히 결단성이 없고 이 말에는 이리로 저리로 솔깃하는 성격을 가진 이었었다. 신입의 이 계사는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래서 서인가 동인과는 국가라는 견지도 다 버리고 오직 자기네 당파라는 견지에서 서로 물고 뜯었다. 이 모양을 본 류 성룡은 거북선의 성공으로 해서 조정에 일어난 풍파를 자세하게 이 순신에게 편지하였다. 그리고 그 끝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나라를 생각함보다 제 몸을 생각함이 많고 공번된 마음보다 남의 잘함을 시기함이 많으니 그대도 눈에 띄게 수군을 늘이어 너무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말라.」하는 구절을 썼었다.
이 순신은 류 성룡의 편지를 받아 보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때에는 둘째 거북선을 짓기 시작한 때였다 순신은 곧 분향하고 엎드려 장계를 지었다. 그는 근래에 동해 일본 쪽으로부터 나뭇조각이 많이 떠온다는 것과 일본에 표류하였던 어민의 말을 들으면. 일본에서는 미구에 조선과 명 나라를 차기 위하여 삼십만 대병을 발한다는 소문이 있고 또 포구마다 병선을 짓는다는 말을 자세히. 정성된 말을 쓴 후에.
『바다로 오는 도둑을 막는 데는 수군 밖에 없사오니 수군이나 육군을 어느 것이나 하나를 폐할 수 없나이다( . . . .)』라 하여. 수군을 페함은 운명을 위태케 함이라고 하였다. 왕은 마침 신입의 계청대로 육군의 전력하고 수군은 파한다. ( )는 교서를 이 수신에게 내리려고 승지에게 붓을 들렸던 차에 이 장계를 받았다. 왕은 몸소 그 장계를 읽고 무릎을 쳐서 순신의 글 잘함을 칭찬한 뒤에 순군 혁파를 주장하는 제신들에게 그 장계를 돌려 보이고 더 다른 의견을 묻지 아니하고 순신의 장계에 「옳다(光).」신입의 장계에 「옳지 아니하다(不光).」는 비지를 내렸다.
이 모양으로 신입의 수군 혁파안은 이순신의 수륙 병존안에게 지게 되었다.
「순신의 글씨 때문에 왕의 뜻이 기울어졌다.」하는 말을 서인들이 돌렸다.
순신의 의견이 옳기 때문이라고 하기 싫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글을 잘해서」라는 말조차 하기 싫었다. 그래서 「글씨를 써서」하는 것으로 순신의 말이 선 이유를 삼은 것이다.
이것이 무론 이 순신의 명예는 아니었다. 도리어 전보다도 더 심각하게 순신은 서울에서 세도 잡은 무리들의 미움을 받을 장본이 되었다 더욱이 당당한 신 입이 일개 무명한 이 순신에게 졌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수욕이었다. 그는 한번 보자고 이를 갈았다.

8

이렇게 이 순신의 장계가 효과를 내어서 수군 혁파만은 면하게 되엇으나.
한편으로 류 성룡 등 동인들의 비전론에 화를 받고 다른 편은 서인들의 육군주의의 화를 받아서 거북선 이십척 건조. 기타 수군 대확장안은 뜻대를 되지를 아니하였다.
이렇게 조선 졍정부에서는 군비를 할까 말까. 수군을 둘까말까 하고 갈팡질팡하며 당파 싸움만 일삼는 동안에 일본에서는 대륙 침입의 계획을 착착 실행하게 되었다. 대마도주 종 의지는 원래 전쟁이 있기를 원치 아니할 처지에 있기 때문에 조신(調信)과 중 현소(玄蘇)를 서울에 보내어 수길(秀吉)이 조선에 길을 빌려 명 나라에 쳐들어 가려 한다는 계획과. 불원에 반드시 일본의 대군이 조선 지경을 범할 터이니 미리 명나라에 이뜻을 통하여 외교적으로 일을 무사히 해격 하도록 하라고 진언하였다. 현소가 김 성일을 보고 귓속으로 한 말이 이러하다.
『명나라가 으래 일본과 끊어져서 조공을 통치 못하므로 수길이 이로써 마음에 분하고 부끄러움을 품어 싸움을 일으키려고 하니 조선이 만일 앞서서 이 뜻을 명 나라에 주문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조공의 길을 통하게 하면 반드시 무사할 것이요. 일본 백성도 또한 싸움의 괴로움을 면할 것이요.』
그러나 김 성일은 이 말을 조정에 주문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이 자기가 전에 장담한 말 수길은 싸울 뜻이 없다는 것과 어그러지기 때문이었다. 현소는 다시 오 억령(吳億齡)에게. 명년에는 일본이 대군을 끌고 조선에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칠 것을 말하매 오옥령은 크게 놀래어 조정에 주달하였다. 그러나 왕은 비전혼자들의 말을 들어 오 억령이 부질없는 소리를 한다 하여 선위사(宣慰使)를 파직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주의 사린 조신에게는 가선 대부를 주고 잘 대접하여 돌려 보낼 뿐이요. 일본의 침입에 대한 아무러한 준비도 할 생각을 아니하였다.
이러한 중에 있어서 오직 전라 좌수사 이순신 한 삼이 모든 핍박을 다 물리치고 일변 병선을 중수하고 거북선을 지으며 일변 관하 각진의 군사를 조선을 중수하고 거북선을 지으며 일변 관하 각진의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모으며 각처에서 이름 있는 대장장이들을 모집하여 화포.창. 칼. 갈퀴. 낫.
소금가마 등속을 만들었다. 이리하여서 전라도 경상도에 목수 대장장이며 활 쏘고 칼 쓰는 호협한 무리들이 좌수영으로 많이 모여 들었다. 굴강을 깊이 파고 방파제를 넓게 높이 쌓고 앞바다 새좁은 물목에는 쇠사슬을 물속에 늘였다.
이것은 적선이 침입하려 할 때에는 육지에서 쇠사슬을 감아 올려서 통행을 막고 또 들물이나 썰물에 물결이 세일 때를 이용하여서는 대어드는 적선을 넘어 뜨리기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우후와 순천 부사도 갈리고 좌수사의 절제를 받는 수령. 첨사. 만호.
군관중에는 이 순신의 충성되고 조금도 사곡함이 없는 인격에 감화를 받는 자도 적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군졸들은 새 수가 도임한 지 일년이다. 못하여 새 수사를 아버지같이 사모하게 되었다. 새 수사는 엄하기 짝이 없으나. 공평하기도 그러하고. 사졸이 힘드는 일을 할 때에는 자기. 먼저 힘드는 일을 하였다.
새 수가 이 순신은 술을 좋아하나 밤이 아니면 먹지 아니하고. 풍류를 좋아하나 국가에 경절이 아니면 기악을 가까이하지 아니하였다.
이 순신이 수사로 온지 일년에 전라 좌도의 수군은 병선이나 장교나 군졸이나 전혀 새 것이 되고 백성들의 풍기까지도 일신함이 있었다.

이순신 - 02 (01~02)

1

임진 사월 십 오일 술시. 지금으로 말하면 오후 열 시쯤 일륜 명월이 돌산도위로 솟다 오른 지 얼망되지 아니하여서 어떠한 배일척이 쌍횃불을 들고 좌수영으로 들어왔다. 햇불을 드는 것은 경보를 가지고 온다는 뜻이었다.
이전에 보지 못하던 쌍횃불 든 배는 좌수영의 군사들과 백성들을 놀라게 함이 적지 아니하였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일본 병정이 온다는 풍설이 많이 돌아 다니던 때여서 백성들의 마음이 조마조마하던 때이므로 어리석고 당파 싸움에만 분주하던 정부에서 아무리 민심을 위무한다 하더라도 그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아니 하고 무슨 큰 변이 발뒤굼치에 따라 오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이 쌍횃불 든 수상한 배는 좌수영 순라선(巡邏船)에게 붙들려 잠시 수험을 받고 곧 굴장에 들어 닿았다. 이날은 국기일이어서 수사 이순신은 죄기를 페하여 전라 관찰사 이광(李珖)에게 편지 답장을 쓰고 또 군부에 대한 보고를 지어 역자(驛子)를 떠나 보내기에 골몰하였다. 그러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 이상하게 산란한 심서를 가지고 바다에 오르는 달을 바라보고 거닐 때에 수직 군관이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 원균의 관(關)을 바쳤다.
수사는 곧 동헌으로 불러 들여 경상 우수사의 관을 열어 보았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오늘 사시(오전 열 시쯤)에 가덕진(加德鎭)첨절제사(僉節制使)전 응린(田應麟)과 천성보 만호(天城堡萬戶) 황정(黃挺) 등의 급보를 접하건댄. 매봉 봉수 감고(연대감고) 서건(徐建) 등이 나와 고하기를. 사월 십 삼일신시(오후 다섯 시쯤에 왜선 여러 ) 십척. 대개 소견에 구십여 척이 경상 좌도 싸리섬을 지나 부산포(釜山浦)를 향하여 나오더라 하기로 첨사 전응린은 방략대로 부산 대대포 우 요격장(右繞激獎)의 군선으로써 정제하여 바다에 내려 변을 기다린다.』
운운한 것이다.
세견선(歲遣船 해마다 장사하러 오는 배)인지도 모르거니와. 구십여 척이나 다수가 나온다는 것은 그 연유를 알 수 없고. 또 연속하여 나오다고 하니 심상치 아니한 듯하다고 생각하고 수사는 곧 우후 이 몽귀(李夢龜)를 불러서 일변 좌수영 각군에 신칙하여 방비와 망보기를 엄히 하여 주양로 대변하기로 하고 또 소속 각진 각포에 말과 배를 놓아 군사와 병선을 정돈하여 강구 대변(江口待變 병선들을 언제나 떠날 수 있도록 항구 밖에 내어 놓고 무슨 일이 생기기를 기다린다는 뜻)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수사 자신은. 첫째로 이 뜻으로 장계를 꾸미고 관찰사. 병마 절도가. 우도 수군절도사에 이문을 지어 말을 태워서 띄웠다.
그러나 이 일이 다 끝나기도 전에 경상 우도수군 절도사 원균으로부터 둘째 관이 왔다. 신시(먼저 관은 사시였다)에 가덕진 첨절제사의 치보(급보)를 보건댄.
왜선일백 오십여 척이 해운대오 부산포로 향하고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인제는 세견선 아닌 것은 확실하다. 세견선이면 고작 많아야 삼십척. 그렇지 아니하면 이십 척을 넘는 일이 적다. 그런데 구십척. 일백 오십척이라 하면 이것은 필시 심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날 밤을 근심 중에 보내고 이튿날인 사월 십 육일 아침 진시(오전 여덟 시쯤)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수(金賥)의 관이 왔다.
『이달 십 삼일에 왜선 사백여 척이 부산포 월편에 왔었다.』
는 것이었다.

2

『왜선 사백척!』
하고. 수사는 과거에 생각하였던 것이 맞은 것을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이날 밤 이경에 또 경상 우수사 원균의 관이 왔다.
『부산진(釜山鎭)은 함락되고 첨절제사 정 발(鄭撥)은 전사하였다.』
하는 것이었다.
십팔일에 또 경상 우수사 원균의 관이 왔다. 그날 일기에 이순신은 이렇게 썼다.
『...........
.』라 하고. 이것을 번역하면 이러하다.
『오후 세 시에 경상 우수사의 관이 왔다. 동래도 함몰이 되었는데 양산 군수와 울산 군수도 조방장으로 동래에 와 있다가 같이 패하였다 하니. 그 분통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병사와 수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동래 뒤까지 왔다가 곧 회군하였다 하니 더욱 가통하다.』
하는 것이다. 하루를 걸러 이십일에 경상 감사 김수로부터 관이 왔다.
『양산(梁山)도 함락이 되었다. 적의 구세가 강성하여 도무지 대적할 자가 없어 승승 장구하여 무인지경 같이 들어오니 전함을 정리하여 와서 구원하라.』
하는 것이었다. 이 기별을 받고 이 수사는 칼을 들어서안을 치고 통분함을 마지 아니 하였다. 더구나 병사니 수사니 하는 무리들이 군사를 끌고 동래 뒤까지 갔다가 적세가 치성한데 겁을 집어 먹고 달아난 것이며. 적이 부산에 상륙한 지 사오일이 못되어 동래. 양산. 김해 같은 거진이 물에 소금 슬 듯 무너진 것을 생각할 때에 이 순신은 가슴이 터짐을 금치 못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곧 군사를 끌고 경상도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조정의 명령이 없이 자의로 움직임은 국법이 허하지 아니 하는 것이므로 순신은 곧.
『경상도를 가서 구원케 하소서.』
하는 장계를 썼다. 그 속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었다.
『적세가 이처럼 치성하여 큰 진(鎭)들이 연하여 함몰되고 내지까지 범하게 되오니 이런 원통함이 또 있사오리까. 분함으로 간담이 찢어지는 듯하오와 말할 바를 알지 못하나이다. 국민된 자 누구나 맘과 힘을 다하여 국가의 수치를 씻기를 원치 아니하는 자 없사오니. 엎디어가 함께 싸우라시는 천지신명의 명을 기다리오며 소속한 주사는 물론이옵고 각 관포(官脯)에도 병선을 정리하여 주장의 명을 기다리라는 일로 본도 각 감병사에게 통의 하였나이다.』
하고 곧 행하지 아니하면 기회를 잃어버릴 것을 말하였으니. 이것은 조정에 있는 대관들이 당파 기타의 관계로 천연세월할 것을 근심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수사는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珖). 방어사(防禦使) 곽영(郭瑛). 병마 절도사(兵馬節度使) 최원(崔遠) 등이며 경상도순변사(巡邊使) 이일(李逸).
관찰사(觀察使) 김수(金脺). 경상 우수사 원균 등에게도 내으 수로 형세며.
양도 주사가 어디서 모일 것이며. 적의 병선이 얼마나 많으며. 시방 있는 곳이 어디며. 기타 책응할 모든 일을 급급히 회답하라는 뜻으로 말을 보내어 이문한 것들을 자세히 아뢰이고. 전라 좌수사의 소속인 방답(防踏). 사도(師徒).
여도(呂島). 발포(鉢浦). 녹도(록島). 오진이며 순천(順天). 광양(光陽). 낙안(樂安).
흥양(興陽). 보성(寶城) 오 읍에 명령하여 본월 이십 구일을 기약하고 본영 앞바다로 모이라고 약속하였다는 말을 적었다.
이장계를 보내고 수사는 더욱 출전 준비에 힘을 쓰며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고 서울에서 회보 오기를 기다렸다.

이순신 - 03 (01~05)

1

임진 사월 십 이일 진시에 일본의 함대는 대마도의 대포(大浦)를 떠나서 신시 말에 부산진 앞바다에 다다랐다. 병선 칠백여 척이었다. 이 칠백여 척의 대함대가 구름과 같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한 보고가 곧 전라 좌수영에서 수사 이순신이 사월 십 오일에 받은 첫 경보이었다. 이렇게 칠백척이나 되는 대함대가 국경에 침입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계책이 없던 조선 관헌들은 실로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그 이튿날인 사월 십 심일 미명에 일본 함대는 아무 저항도 받음이 없이.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진을 향하고 개미때와 같이 진군하였다. 이날에 부산진을 지키는 주장인 첨절제사(僉節制使) 정 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에 사냥을 나가서 자고 아침에야 비로소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다는 경보를 듣고 타고 갔던 병선 세 척을 끌고 창황하게 부산진으로 돌아 와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평일 같이 있었다. 군사들이나 백성들이나 조금도 놀라지 아니하고 성 위에 올라 가서. 일본군이 이상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소총을 메고 개미떼와 같이 몰려 들어오는 것을 구경삼아 보고 있었다. 이것은 조정이 심 성일의 말을 믿어서 일본이 싸우러 오리라는 말을 일체 입 밖에 내기를 금지하여. 백성들이 전혀 난리가 난 줄을 모를는 까닭이었다. 해마다 한번씩 일본 배들이 장사하러 오는 예가 있으니. 이것도 아마 그것인가보다. 그런데 이번에는 배도 많고 사람도 많고 차림차림도 현란하구나 할 뿐이었다.
『사또. 암만 해도 저 일본 사람들이 군사인가 보오. 평수 길이 싸우러 온다더니 과연엔가 보오.』
하고. 부하가 의심스럽게 말하나 결의 사람들은 나라에서 금하는 말(싸움이 난다는 말)을 한다고 눈을 끔적거리고 첨사 정 발은 작취가 미성한 낯에 웃음을 띠우며.
『일본이 아무리 강성 하기로니 무명 지사를 일으켜 가지고 천벌을 면할 수가 있느냐.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또 설사 일본이 감히 싸움을 돋운다 하기로니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 내 이 칼 하나면. 만 명이 오기로 무슨 걱정이냐.』
하고 칼을 만지며 뽐내었다 . . 정발은 칼쓰기를 자랑하고 또 호협한 남아다.그 말이야 시원하다. 또 정 발의 자신에는 노상 이유가 없지도 아니하였다. 부산 해성(釜山海城)에는 육천명 군사가 있었고 성의 주위에는 깊은 못이 있고 바닷가에서 성에 이르는 동안에는 마병이 말을 달리지 못하도록 철질려를 깔았다. 이만한 병력과 설비가 있으면 왠만한 적병은 무서워하지 아니하는 것도 그럴듯한 일이다.
첨사 정발은 이러한 모든 것을 믿고 배짱 편안하게 동헌에 앉아서 지난 밤 부족한 잠을 졸고 있었다.
이때에 일본 장수 소서행장(小西行長)에게서 부산 첨사에게 사자가 왔다. 그 사자는 공손히 첨사에게 예하여 소서의 편지를 첨사에세 드렸다. 그 편지에는 보통 편지 모양으로 환훤의 인사가 있고 그 끝에 이번에 평수길이 대군을 발하여 명 나라를 치려 하니. 일본 군사레게 길을 빌려 무사히 명나라로 들어 가게 하라 하는 것이었다. 정발을 그 편지를 보고 비웃는 듯이 껄껄 웃고 내어 던지며.
『네 저놈을 성 밖에 몰아 내쳐라!』
하고 호령하였다. 정 발의 생각에 그 편지는 괘씸한 것 보다도 엉큼하였던 것이다.

2

군졸들은 소서행장의 사자를 뒤 떨미를 짚어서. 그야말로 발이 땅에 붙을 새가 없이 성문밖에 몰아 내쳤다. 그러나 한 가지는 판명하였다. 그것은 이 배와 사람들이 해마다 오는 세견선과 상인들이 아니라. 싸우러 온 병선이요. 군사라는 것이었다.
부산진 첨사 정발은 소서행장의 사자를 몰아 내고 곧 군중에 전령하여 성문을 굳이 닫고 적병을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군사 이천명을 성 위에 벌여 놓아 성 밖으로 모야 드는 적을 활로써 막게 하고. 남은 군사는 갈라서 혹은 성문을 지키게 하고 혹은 병기를 정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말을 놓아 다대포첨사(多大포僉使) 윤홍신(尹洪信).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박홍(朴泓).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이각(李珏). 동래 대도호부사(東萊大都護府使) 송 상현(宋象賢)에게 일본군이 길을 빌리라 하는 말과 그것을 거절하였다는 말과 자기는 부하를 거느리고 죽기로써 부산성을 지킬 터이니. 만일 부산진의 힘만으로 적군을 막아 내기 어려울 경우에는 시기를 놓치지 말고 구원해 달라는 말을 전하였다.
다대포는 남으로 이십리도 못되고 좌수영은 부산에서 동래부로 가는 중로에 있어서 부산진에서는 . 십오리도 다못되는 곳이요. 거기서 동래부는 십리 남짓하였다. 좌병영은 울산 지경에 있으니. 그것도 부산진에서는 하룻길에 불과하였다.
정발은 설사 칠백여 척의 일본 병선이 사오만의 군사를 싣고 왔다 하더라도 무서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편 군사로 보면 부산진에 육천이 있고. 좌수영에 일만 이천이 있고. 동래부에 육천이 있고. 좌병영에도 일만여 명이 있고. 게다가 적군이 가지지 못한 성과 지리가 있으며 또 인근에 거진이 많은즉 이삼일 내로 오륙만의 군사를 모으기는 어렵지 아니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방어의 계획을 세우고 첨사 정발이 검은 공단 갑옷에 황금 투구를 쓰고 사랑하는 일검 보국(一劍報國한칼로 나라 은혜를 갚는다)의 칼을 차고 말에 올라 군사를 지휘하고. 비장. 병장. 군관들도 모두 전복 전립에 우의를 갖추고 활시위를 팽팽하게 매고 새로 갈아서 약을 바른 살촉을 박은 화살을 전동에 가득하게 넣어 메고 성 위에 벌인 진중으로 돌아 다니며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병이 몰아 오기만 하면 융전할 준비를 하고 일변 소와 개를 잡아 군사들을 한밥 먹이고 싸워서 이긴 뒤에는 칠백척 배와 뱃속애 있는 물건은 군사들이 맘대로 나누에 가질 것을 약속하였다. 이리하여서 하늘에 닿을 듯한 기운을 가지고 소서행장의 군사가 쳐들어 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진시가 되자 일대의 일본 군사다 뽀얗게 먼지를 날리며 장사 진형을 가지고 부산진을 향하여 달려 왔다. 멀리서 보기에 일만 명은 될 듯하였다. 맨 앞에는 장수 같은 자가 말을 타고 앞섰고 중간쯤해서는 붉은 비단 갑옷을 입고 금빛이 번쩍거리는 뿔이 달린 투구를 쓴 대장이 여러 장수의 옹위를 받고 말을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이 붉은 갑옷을 입은 장수는 제일군의 대장인 소서행장이요, 진의 맨 앞에 선 장수는 선봉장 모리 휘원(毛利輝元)이었다.
소서행장의 군대는 부산 해성에서 활 두어 바탕될 만한 곳에 와서는 진형을 학익진(鶴翼陣)으로 변하여 부산성을 에워 살 모양을 보이고는 잠간 진을 머무른 뒤에 어떤 장수 하나가 단기로 부산성 남문을 향하고 달려 와서 편지 하나를 전하였다. 그것은 아가 편지와 마찬가로 길을 빌려 달라는 것이요. 만일 빌리지 아니하면 십만대군으로써 부산성을 무찌르겠다는 최후 통첩이었다.
『그놈을 죽여라!』
하고 비장들이 분개하였으나 정발은.
『단기로 온 사자를 죽이는 것이 의가 아니다.』
하여 만류하고 왜어 통사를 시켜.
『길을 빌리는 것은 일개 병장이 할 일이 아니니. 우리나라 왕께 여쭈어라.』
는 회답을 전하고 또.
군사를 물려 서울서 『 회답하기를 기다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사정 없이 멸하리라.』
는 위협하는 말을 보내었다.

3

소서행장의 군사는 정첨사의 회답을 받아 보고는 무엇을 생각함인지 군사를 돌려서 물러갔다. 정발은 적군이 물러 가는 것을 보고 심히 만만하게 여겨서.
제장을 불러서 술을 먹고 즐기고 순사들에게도 술을 주어서 질탕하게 먹었다.
마치 승전이나 한 듯하였다.
그러나 소서행장 군이 물러 간 것은 결코 정발과 그 부하가 생각하는 것처럼 서울서 회보가 오기를 기다리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부산성의 방비가 심히 삼엄한 것을 보고 당장 공격하면 이기기가 어려운 줄을 알았기 때문에 아직 거짓 믿고 물러 가서 조선군으로 하여금 마음을 놓게 하자는 것이었다.
부산 성내에서는 군사나 백성이나 평일같이 희희낙락하게 그날을 보내고 밤에 각각 자리에 들어 단잠을 잤다. 잠을 자서는 아니 될 첨사 정발과 부하 장졸들까지도 잠을 잤다.
이날은 곧 산과 들에 꽃까지도 역력히 볼 수가 있었다. 따뜻하고 생명에 찬 첫여름의 달밤은 극히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성뭉을 지키던 장졸들과 성랑으로 돌며 파수를 보던 장졸들도 잠이 들고 달이 서편 하늘에 기울어져 부산(산 이름)의 그림다가 먹과 같이 검게 부산성을 덮고 새벽빛은 아직 비치지 아니한 축시 말 인시 초쯤해서 수만 명 소서의 군사는 선봉장 모리 휘원의 지휘 밑에 열 겸스무 겹으로 부산 해성을 에워쌌다.
대게 일본군의 본진이 유둔하는 곳에서 부산진까지는 오리는 넘고 십리는 좀 못될 만한 가까운 거리이므로. 달이 넘어 가기를 기다려서 대군을 몰아 삽시간에 부산진을 에워 싼 것이다.
초저녁에는 그래도 파수도 보았으나. 닭이 울고 새벽이 가까우매 술 취하고 훈련 없는 군사들은 그만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소서군은 부산의 지리를 황하게 잘 아는 왜호(倭戶)를 앞잡이로 성못(성 밖에 파놓은 못)의 얕은 데를 가리고 성내의 수비가 약한 곳을 가리어서. 일변 흙으로 못을 묻어 길을 내이고 일변 비제(飛梯)를 성애 놓고 깊이 잠든 부산성으로 터 놓은 물같이 밀어 들었다.
소서군은 성에 들어오는 대로 집에 불을 놓고 조총을 콩 볶듯 놓아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 피와 주검이 길을 막았다. 마음 놓고 자던 백성들은 이 불의의 변에 놀라시 혹은 어린 아이를 안고 혹은 늙은 부모를 업고 갈팡질팡 하다가.
혹은총에 맞아 주고 혹은 군사에게 밟혀 죽었다. 조선 군사들도 활을 들어 응전하였으나 벌써 겁을 집어 먹을 뿐더러. 처음 당하는 조총의 위력에 활이 당하기가 어려웠다. 만일 먼 거리에서 마주 보고 싸우면 활이 조총(그때 조총은 멀리는 못 갔다)보다 나은 수도 있었으나 단병 접건에는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일본 군사는 시가 싸움에 익되 조선 군사는 야전에만 익엇 어느 편으로 보든지 조선이 불리하였다. 길 잘 아는 왜호를 앞세운 일본군은 내 집에 들어가듯이 성내의 요새지를 점령하고 마침내는 첨사 아문을 포휘하고 첨사에게 항복을 권하였다.
『사또! 형세가 이 지경이니. 인제는 항복하는 수밖에 없지 아니하오.』
하고 바장(비장) 황운(黃雲)이 칼을 들고 달려 나가려는 첨사 정발의 갑옷 소매를 끌었다.

4

『항복을 말하는 자는 군법에 처하리라.』
하고 정발은 여전히 싸움을 독려하였다. 영문 안에 남은 군사가 아직 천명은 남았다. 육천명 군사 중에 오천명은 벌써 다 죽은 것이다. 비록 늦게 응전하였으나 정발은 잘 싸웠다.
『에크. 검은 갑옷!』
하고 일본 군사는 정 발의 검은 갑옷이 번쩍할 때면 무서워하였다. 그의 칼은 참으로 신인 듯하여. 그의 칼이 번뜩이는 곳에는 적병이 삼 슬 듯하였다.
그러나 중과 부적하여 정 장군은 마침내 남은 군사를 끌고 영문 속에 물러 와서 최후까지 싸우기를 결심한 것이다.
해는 올라 왔다. 성내에는 화광이 충전하고 성 위에는 도처에 붉은 기였다.
붉은 기는 일본 군사의 기었다. 남은 군사도 하나씩 적군의 조총알에 맞아 거꾸러지고 한량 있는 화살도 거진 다하였다. 푸르륵하는 조선 군사의 활쏘는 소리. 밖으로 들려오는 백성들의 우짖는 소리!
『사또! 인제는 살도 다하였으니. 도망하엿다가 훗 기회를 기다림이 어떠하오?』
하고 비장 황운이 정 발에게 청하였다. 활을 쏘자니 살조차 없는 군사들은 부질없어 활을 들고 첨사를 바라볼 뿐이었다. 안에서 화살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일본 군은 납함하며 삼문 밖에 다다랐다.
정발은 웃으며.
사내가 죽을지언정 『 도망을 한단 말이냐.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 터이니.
가고 싶은 자는 가거라........』
하고 칼을 빼어 들고 삼문을 향하여 나갔다. 마지막으로 적을 하나라도 죽이고 자기도 죽자는 것이었다. 어제 저녁을 먹고는 아직 아침도 먹지 못한 군사들은 축시 말에서부터 진시가 넘도록 싸우는 통에 시장한 줄도 몰랐으나 살이 진하고 더 싸울 기력이 없으니. 일시에 시장과 피곤이 오는 듯하였다. 그러나 정 발의 비장한 말에 군사들은 다시 기운을 내어.
『우리도 사또와 같이 이 성 귀신이 되려오!』
하고 칼이 있는 자는 칼을 들고 칼도 없는 자는 활집과 몽둥이를 들고 정발의 뒤를 따랐다. 정발은 삼문을 열기를 명하였다. 삼문은 열렸다.
밖에 있던 소서행장의 군사는 와! 하고 안으로 몰려 들었으나 정발의 칼바람에 경각간에 수십 명이 죽는 것을 보고 뒤러 물러섰다.
정발은 칼을 두르며 도망하는 소서행장의 군사를 따라 고루(북단 다락)까지 나갔다. 군사들도 정 발의 뒤를 따라 용감하게 적군을 엄살하여 수백의 적군을 죽이면서 장거리까지 나왔으나. 마침내 정발은 조총의 탄환에 십야 군데를 맞아 땅에 엎더졌다. 비장 황운은 엎더지는 정발을 안아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도 탄환에 맞아 주장을 안은 채로 넘어져 죽었다.
이리하여 진시말에 부산진 육천명 장졸은 거의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 죽고.
부산진은 일본군에게 점령함이 되었다. 이날에 일본군이 죽은 것도 사천이 넘었다.

5

정발은 형세가 위급함을 보고 여러 번 좌수영9이십리미만)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좌수영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중에 몇 사자는 적군에 붙들린 것도 사실이지만 빤하게 바라보이는 곳에서 경상 좌수사 박홍이 부산진이 위급한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부산진을 일본군이 에워쌌다는 말을 듣고 경상 좌수사 박홍은 곧 애첩과 가족을 동래부로 피란시키고 자기는 경보를 몸에 지니고 뒤산에 올라 부산진의 형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후. 군관 중에는 군사를 내어 부산진을 구원하자는 사람도 있었으나 박 홍은.
『군사를 경솔하게 움직일 수 없다.』
는 핑계로 듣지 아니하였다. 약한 장수의 밑에는 강한 군사가 없었다.
부산진에서 위급하다는 기별이 와도 수사가 꼼짝하지 아니하는 양을 보고 군관.
군졸들은 모두 장수의 밎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가족과 재물을 뭉쳐 가지고 동래부로 도망하였다. 그러다가 정 발로부터.
『위급하다. 곧 구원하라.』
하는 최후의 고목이 온 때에 박홍은 창황히 말을 내이라 하여 도망할 준비를 하고 그래도 후일에 책망을 두려워함인지 서울로 사람을 놓아.
『부산성에는 붉은 기가 찼아오니 아마 적에게 함락된 듯하나이다.』
하는 장계를 띄우고 군사를 시켜 군량고와 병기고와 민가에 불을 놓게 하고 말을 몰아 동래성을 향하고 달아났다. 군사 삼만을 가진 거진으로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달아나는 수사 박홍을 향하여 군관 오 억년(吳億年)은 무수히 욕질하고 마침내 분을 참지 못하겨 활을 당기어 박홍의 등을 쏘니. 박홍은 맞아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놀래어 북을 향하고 달아났다.
오 억 년은 수사 박홍을 죽이고 (기실은 죽지는 아니하였다)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달려가 부산을 구하려 하였으나. 한번 흩어진 군사의 마음은 다시 수습할 길이 없어 몇 개 동지를 규합하여 빈성을 지키리고 하였다. 죽은 줄 알았던 박홍은 죽지는 아니하였다. 다만 그엉덩이에 살이 박혔을 뿐이었다.
그는 종자의 도움을 받아 천신 만고로 밀양까지 도망하였다. 차마 동래부로 들어갈 염치는 없었던 것이다.
부산진을 손에 넣은 소서행장은 선봉 모리 휘원에게 명하여 곧 좌수영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좌수영의 일만 이천 장졸은 이미 수사 박홍의 본을 받아 다 흩어지고 오직 군관 오 억년이 죽기를 맹세하는 수백의 군졸을 거느리고 모리 휘원의 오만 대군을 대항하였으나 그것은 손으로 바닷물을 막는 것보다도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오 억 년과 그 동지들은 한 아니 남고 다 죽기까지 싸웠다. 일본군이 동래성에 다다른 것은 부산진이 함락된 십사일신시였다.
이보다 먼저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일본군이 부산성을 친다는 경보를 듣고 곧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 울산 군수(蔚山郡守)이 언함(李彦譀) 양산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珪)에게 이 문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송상현의 계획으로 말하면. 동래성에 일본군을 막아 한 걸음도 내지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만일 동래부가 함락이 된다고 하면.
일본군은 밀양을 도f아서 서울로 향할 수도 있고. 경주를 돌아서 서울로 향할 수도 있으니. 동래 한 목에서 막지 못하면 그 십배의 힘을 가지고도 막아 내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순신 - 03 (06~08)

6

경상 좌병사이 각은 동래 부사 송상현의 말을 옳게 여겨 조방장(助防將)홍 윤관(洪允寬). 울산 군수 이 언함과 칠천 병마를 거느리고 밤도와 행군하여 십사일 오정에 동래부에 도달하고 양산 군수 조영규도 군사 이천을 거느리고 그보다 좀 일찍 동래성에 들어 왔다. 이리하여 동래성에는 모두 이민의 군사가 있었다. 미시 말이나 되엇 부산진의 패보가 동래에 들어오고 또 얼마 아니하여 좌수사 박홍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서 좌수영이 싸우지도 아니하고 무너졌다는 경보가 들어 왔다. 이 경보를 받더니 참땋게 있던 좌병사이 각(李珏)이 동래 부사 송상현을 보고.
『여보 동래. 나는 가오.』
하고 동래에서 떠날 차비를 하였다.
『가시다니 사또가 어디를 가신단 말씀이요? 적병을 막으려고 밤도와 어셨다가 적병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가시다니. 어디로 가신단 말이요?』
하고. 송 부사는 병사의 소매를 붙들었다.
『아니. 내가 피하는 게 아니요. 나는 대장이니까 밖에 있어서 각진 군사를 지휘를 하야지 성안에 있어서 쓰겠소. 성을 지키는 것은 동래가 맡아 하오.』
하고. 동래 부사 송상현이 붙드는 것도 뿌리치고 아병 이십 명만 동래에 머무르게 하고 자기는 별장과 군사를 데리고 서문을 열고 달아나 소산(蘇山)이란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좌병사이 각은 부산진이 함락되고 첨사 정발이 육천 병사로 더불어 전사하였단 말을 듣고 잔뜩 겁을 집어 먹어서 듣기 좋은 핑계로 동래성을 빠져 나온 것이다. 그의 생각 같아서는 곧장 서울로 도망이라도 하고 싶건마는.
아직도 염치가 약간 남아서 소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니. 여기서 기회를 보아서 동래성 싸움에 일본군이 지면 자기도 의기 양양하게 동래성으로 들어 가고.
동래가 지면 내빼자는 계교다. 왜 태평 시절에 병사 노릇을 못하고 난시에 병사가 되었던고 하고 이 각은 수없이 한탄하였다.
이 각이 바로 소산에 이르러 자리를 잡을 만한 때에 동래성에서는 포향과 고각이 진동하엿다. 일본군과 접전이 된 것이다. 이 각은 자기가 선견지경명이 있어서 도망한 것을 다행히 여겼다.
병사 이 각이 달아난 뒤에 동래 부사 송사 송상현은 그 병슬을 따라 주장이 되어서. 동래성 남문에 올라 전군을 지휘하였다. 울산 군수 이 언함(李喭諴)은 죄위장은 삼아 동문을 지키게 하고.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호우위장을 삼아서문을 지키게 하고. 조방장 홍 윤관(洪允寬)으로 충군을 삼아 성중과 북문을 지키게 하였다. 십사일 유시에 일본군의 선봉이 동래 남문 밖인 취병장(지름 말로 연병장)에 이르러 유진하였다.
일본 진중으로서 어떤 키 큰 순사 하나가 무기를 들지 아니하고 손에 흰 목패 하나를 들고 성 가까이 오더니 그것을 성중에 던졌다. 군사가 그 목패를 집어 부사 송상현에게 드리니. 부사는 가도 문제에 관하여 평 수길의 사자인 대마도주 평조신(平調信 =() 調信)과 절충한 일도 있었고 또 조정으로부터 「다시 가도에 관한 청이 있거든 단연 거절하고 이체 접제 말라.」는 훈령도 있으므로.
『..(죽어도 길을 못 빌린다.)』
이라고 큰 목패에 써서 성 위에 세우게 하고. 곧 방포하고 활을 쏘아 싸움을 돋우었다.

7

해가 지도록 양 진이 대 접전을 하여 피차에 수천 명의 사상자가 생겼으나 무론 승부가 나지 아니하였다. 밤도 낮과 같이달이 밝았으므로 으레히 일본군이 엄습할 것을 믿었으나 적연히 아무 소리가 없었다. 군사들은 아마 일본군이 잠을 자고 내일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싸우려는 가 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사는 자지 아니하였다. 동래 부사 송상현이 쉽사리 달아나거나 항복할 위인이 아닌 줄을 안 일본군은 계교를 쓰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밤 동안에 군사를 성으로 돌려 방비가 약한 북문으로 쳐들어 오자는 것이었다.
송 부사는 충성과 용기가 있었으나 결코 장수의 재목은 아니었다. 하물며 울산 군수 이 언함은 병사 이 각이 달아날 때에 같이 따라 가지 못한 것을 향하여 벌벌 떨고 앉았고. 오직 조방장 홍 윤관. 양산 군수 조영규 같은 장수들은 죽기로써 성을 지키려고는 하나. 적군은 오만이 넘고 이편은 이만이 다 못되니.
비록 성이 있다. 하더라도 승패는 벌써 정한 일이었다. 만일 도망하였던 이 각이 그 군사를 끌고 온다면 며칠 동안은 견딜 만도 하지마는 돌아 올 사람이 도망할 리가 있는가.
이렇게 군사는 잔약하고장수는 없는 동래성은 마치 도마에 오른 고기와 같은데. 사월 보름의 달 그림자는 점점 금정산(金井山)으로 빗기고 뒷산의 두견만 목이 메어 울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진중은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지금으로 이르면 아침 네 시가 될락말락한 때에 동북방을 지키던 군사가 놀래어 일시에 소시를 쳤다. 그것은 새벽빛이 훤히 올려 쏘는 동쪽으로부터 불의에 괴상한 물건이 올라 온 때문이다. 보통 사람의 삼 갑절이나 큰 허수아비에 붉은 옷을 입히고 푸른 수건을 동이고 등에 붉은 기를 지고 번쩍번쩍하는 긴 칼을 찬 흉물이 성안으로 넘실넘실 들여다보는 것이다.
밤새도록 겁을 집어 먹고 있던 군사들에게 이 흉물은 완전히 정신 착란을 주었다 더구나 장수 되는 . 울산 군수 이 언함이 소리를 치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는 군사들은 병기를 던지고 통곡하였다.
그러나 이 언함이 피신할 수 있기도 전에 성을 넘어 정말 일본 군사들이 칼을 두르고 조총을 놓으며 달려 들었다. 울고불고하던 조선 군사들은 두 팔을 들고 땅바닥에 앉은 대로 칼과 총에 맞아 죽었다. 달아나던 이 언함은 다리에 기운이 없어 일본군에 붙들렸다.
그는 일본 군사 앞에 엎드려 합장하고 살려 달라고 빌었다. 일본군은 그가 울산 군수 이 언함인 줄 알고는 죽이지 않고 뒷짐으로 결박을 지어 앞을 세우고 성내의 길을 인도하라고 하였다. 이 언함은 길을 인도하여 부사 송상현의 진을 가리켰다. 일본군은 성을 넘어서 엄살하는 줄을 안 조방장 홍 윤관은 군사를 돌려 일본군이 남문으로 향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그의 군사는 너무나 적었다. 홍 윤관이 거느린 이천명 군사는 순식간에 총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홍 윤관 자신도 군사들과 한 가지로 맞아 죽었다. 그러나 홍 윤관이 죽은 것이 결코 값이 없지는 아니하였다. 홍 윤관의 저항이 없었던들 남문에 있는 본진은 준비도 없는 동안에 경각 간에 함몰을 당하였을 것이다. 그 뿐더러 홍 윤관의 군사는 졌더라도 하나가 하나씩은 적군을 죽이고 죽었다.

8

홍 윤관의 군사가 전멸을 당한 뒤에 일본은 조선군의 시체를 밟고 넘어 관사 앞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거기는 서문을 지키던 조영규가 지키고 있었다. 관 앞은 길이 넓어서 양쪽 군은 수천 명이 한꺼번에 단병전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소서행 장군의 주력이 남문의 본진을 습격할 때이므로 본진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무서운 혈전을 하기 약 한 시각에 조영규는 민가의 지붕에서 내려 쏘는 적의 총환에 맞아 죽고 조영규는 군사도 거의 전멸하였다.
진시가 넘어서 남문을 본거로 한 본진은 복배로 적의 공격을 받았다.
부사는 비장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향리 송 박(宋迫) 등을 데리고 끝까지 싸웠으나 중과 부적하여 마침내 남문은 열리고 본진은 함락이 되었다.
남문을 중심으로 길과 성에는 피를 뿜고 넘어진 군사가 몇 겹씩 덧쌓였다.
부사 송상현은 일이 끝난 줄 알았다. 죽더라도 이 나라의 신하 된 절과 예를 잃지 아니하리라 하여. 갑옷 위에 조의를 껴입고 호상에 걸터 앉아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윽고 일대의 일본 군사가 남문 누상으로 침입하여 상현에게 칼을 견주었다. 그 군사들 중에 평 조익(平調益)이라는 장수가 있어서. 상현을 향하고 달려 드는 군사를 제지하여 뒤로 물리고 상현더러 어서 도망하기를 재촉하였다.
대개 평 조익은 대마도주 평 조신의 친척으로서 작년에 동래부에 사신의 한 사람으로 와서 송상현의 관대를 받았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상현은 듣지 아니하였다.
내가 왕명을 받아 『이 성을 지켰거든. 죽기 전에 이 자리를 떠나겠느냐.』
하였다. 그래도 평 조익은 상현의 옷을 끌어 피할 틈을 가리켰다. 상현은 마침내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호상에 내려 북향하고절한 끝에 부채를 당기어.
『(....)』
이라고 쓰니. 이는 그의 노부 복홍(福興)에게 보내는 결별사다. 그 뜻으로 말하면.
『외로운 성이 적에 에워 싸였으되. 다른 진들이 본체 아니하도다. 군신의 의는 무겁고 부자의 은은 가볍도다.』함이다.
평 조익도 송상현을 구하지 못할 줄 알고 밖으로 몸을 피하니. 다른 군사들이 달려 들어 칼로 상현을 위협하고 항복을 청하니. 상현은 오른손에 병부를 잡고 왼손에 구리인을 잡고 호상에 앉은 대로 움직이지를 아니하였다.
이때에 벌써 성중에는 어디나 붉은 기가 날리고 총소리와 고각함성도 그쳤다.
『사또. 항복을 하시오. 거역하면 죽을 길 밖에 더는 있소?』
하고. 송사현에게 권하는 것은 울산 군수 이 언함이었다. 그는 일본 장수의 복색을 입고 일본 칼을 찼다. 송상현을 대하매 부끄러워 감히 낯을 들지 못하나. 모리 휘원의 명령을 거슬리지 못하여 말을 한 것이었다.
『이놈. 역적놈아!』
하고. 상현은 이 언함을 보매 눈초리가 찢어질 듯하고 그의 검은 어룩ㄹ은 노기로 주홍빛이 되었다. 상현은 병부와 인을 한 손에 걷어 쥐고 한 손으로 칼을 빼어 이 언함을 치려 하였으나. 곁에 있던 일본 군사 하나가 나는 듯이 칼을 들어 송상현의 칼 든 팔을 쳤다. 상현의 팔은 조복 소매와 함께 떨어졌다.
또 한 일본 군사가 상현의병부와 인을 잡은 팔을 찍으니. 상현의 팔은 병부와 인을 꼭 쥐인 대로 마루에 떨어졌다.
두 팔을 다 잃은 상현은 오른편 발로 자기의 떨어진 손에 있는 인과 병부를 밟았다. 오른편 발과 왼편발이 다 떨어지매 상현은 엎드려 인과 병부를 입에 물었다. 그의 목이 잘릴 때에도 그의 입은 병부와 인을 놓지 아니하였다. 병부와 인을 아니 놓는 것은 오늘날로 이르면 국기나 군기를 아니 놓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리하여 동래성 남문에서 송상현은 죽었다.

이순신 - 04 (01~02)

1

상현이 팔과 다리와 목을 잘리어 죽은 뒤를 이어서 부사와 같이 있던 비장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稀壽). 향리 송 박(宋迫). 상현을 따라다니던 신 여로(申汝櫓) 등도 항복하지 아니하고 주장의 곁에서 같이 죽었다.
이일이 끝난 뒤에 적군의 대장 평 의지(平의지)와 일본 중으로서 조선에 여러 번 사신으로도 다니고 임란을 통하여 소서행장의 군중을 떠나지 아니한 현소(玄蘇)가 와서 송상현을 찾으니. 부하가 그 참혹한 여러 시체를 가리키며 이 속에 있다고 하였다.
『죽기전에 무슨 말이 없더냐?』
하고. 평 의지가 물으니. 부하가.
『이것이 이웃 나라의 도리냐? 우리 나라가 너희 나라를 배반한 일이 없거든.
네 어찌 우리를 배반하느냐. 하더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평의지는 송상현의 시체를 수습하여 동문 밖에 장사하게 하고 남편을 따라 죽은 상현의 첩 김 섬(金纖)도 그 곁에 묻게 하였다. 이렇게 동래성이 함락된 뒤로는 일본군은 거의 아무저항이 없이 서울을 향하고 올라 갔다.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 윤홍신(尹洪信)이 그 아우 홍제(洪梯)와. 함께 죽고.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이 동래를 구하러 갔던 길에 황산(黃山)에서 적군을 막으려 하였으나 소서행장. 송포 진신(松浦鎭信)등의 군사에게 패하여 군관 이 대수(李大樹). 김효우(金孝友)와 군사 삼백여 명을 잃고 밀양(密陽)으로 도망하였으나 그것도 지키지 못하여 군기와 창고를 불사르고 산으로 달아나고. 동래를 버리고 달아난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 이 각(李珏)은 동래가 위태하여 운명이 경각에 달린 것을 보고는 소산(蘇山)을 버리고 군사를 끌고 병영(兵營)으로 달아 돌아 와 인마를 발하여 그 사랑하는 첩과 무명 일천 필을 서울 집으로 실려 보낼 제 그것을 반대한다 하여 진무(鎭撫)를 베었다. 밤에 병영 안에 경동이 일어가기를 사오차나 하였으나 대장인 이 각이 그것을 진정하지도 못할 뿐더러 새벽을 타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에 병영에는 십 심 읍의 군사 오만여 명이 모여 있었다. 이 각이 달아나려는 것을 보고 안동 판판 안 성(安東판判安性)이 그 불가함을 책한즉.
그러면 그대는 제장으로 더불어 성을 지키고 그대의 정병을 나를 달라. 내 나아가 서산(西山)에 진을 치었다가 적이 오거든 내외 협공하자 하였다. 안 성이 그 말을 좇았더니 이 각이 서문으로 나아가 태화강(太和江)을 가리키며.
『이놈들아. 적군이 벌써 저기 온 줄을 몰라.』
하고 말을 채쳐 달아났다. 단 성이 이 각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칼을 만지며 분개하였다.
병사의 우후 원 응두(元應斗)가 또 성 밖에 나가기를 청하는 것을 안 성이 소리를 높여.
『내가 이 각이 놈을 못 베인 것이 한이어든. 네놈도이 각이 놈을 본받아 달아나려느냐.』
하니. 응두가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얼마 아니하여 달아났다. 그뒤를 따라 장수들과 관리들이 다투어 달아나니. 병영에 모이었던 십 삼 읍 오만 대군이 한번 싸워 보이지도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김해 부사(金海府使) 사 예원(徐禮元)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고.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 유검(李惟檢)이 달아 나고.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조 대곤(曺大坤)이 영문을 버리고 달아나고. 경상 감사 김수(金脺)가 군사를 거느리 고진주에 있어서 동래와 부산을 성원하려다가. 동래. 부산이 함락되었단 말을 듣고는 군사를 버리고 영산(靈山)으로 달아나고. 여러 고을들이 이어 함락된다는 소문을 듣고는 영산에서 합천(陜川)으로 달아나고. 또 합천에서 지례(知禮)로 달아나고.
그리고도 달려온 초계 군수 이 유검을 만나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난 죄로 유검을 베었다.
경주부(慶州府)는 언양(彦陽)으로 질러 온 가등청정(加藤淸正)군에게 포위되어 부윤 윤인(尹仁)은 마침 없었고. 판관 박의(朴毅)와 장기 현감(長鬐䝮監)이 수일(李守一)이 싸우지도 아니하고 달아나 버렸다.

2

부산 함락의 경보가 서울에 올라 온 것은 사월 십 칠일이었다. 이것은 달아나기로 첫째인 경상 좌도 수군 절도사 박홍(朴泓)이 달아나면서 보낸 장계다.
『부산진에 연기 나고 붉은 기가 찼아오니 아마 적군이 들어 온 모양이로소이다.』
한 것이었다. 이 경보를 듣고 왕은 이것이 다 김 성일(金誠一)이 일본을 다녀 와서 보고를 잘못한 것이라 하여 우선 김 성일을 잡아 올리라 하였다. 이때에 김 성일은 경상 우도병마 절도사가 되j 부임하는 길에 있었다. 정진(鼎津)을 건너 해망원(海望原)에 이르러서 성을 버리고 도망해 오는 갈린 병사 조 대곤(曺大坤)을 만나서 인과 병부를 받았다. 그리고 성일이 함안에 이르렀을 때에 나명을 받은 것이다.
성일이 갈리고 조 대곤이 다시 병사가 되었으나 적군이 온단 말을 듣고 다시 달아났다 왕은 부산 동래가 .. 함락되고 적군이 무인 지경같이 내지로 들어 온단 말을 듣고 심히 놀래어 곧 영의정(領議政)이 산해(李山海). 좌의정(左義政) 류 성룡(柳成龍). 우의정(右議政) 이 양원(李陽元) 등을 불러 방어할 계책을 물었다.
그러나 삼 대신은 맥맥히 서로 볼 뿐이었다.왜 그런고 하면. 그들은 다 일본군이 오지 아니한다고 보아 양병을 반대한 자들일뿐더러. 서울에는 군사라고는 명색뿐이요. 정말 싸울 만한 것은 없었음이었다.
정부 대신과 비변사(備籩使)를 삼아 중로(가운데 길)를 지키게 하고. 성응길(成應吉)로 좌방어사(左防漁使)삼아 좌도로 보내고. 조경(趙敬)으로 우 방어사(右防禦使)를 삼아 서로(서쪽 길)로 보내고. 유극량(劉克良)으로 하여금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로 하여금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변응성(邊應星)으로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삼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군사는 없으니까 저마다 모집을 해 가지고 가기로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왕은 좌의정 류성룡을 신임함이 자못 두터워 류 성룡의 계책을 들어 병조 판서(兵曹判書) 홍여순(洪汝諄)을 갈고 김응남(金應南)으로 대신케 하고.
심충겸(沈忠謙)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삼으니. 이는 일굴 병마의 권을 류 성룡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병마의 최고 감동권을 주었다. 류 성룡은 병조 판서 김응남으로 부체찰사를. 옥에 갇혀 있던 전 의 주 목사 김 여물(金汝朆)을 특사하여 수원을 삼기를 청하고. 당대 명장으로 누구나 첫 손가락을 곱는 이 일(李鎰)로 순변사(巡邊使)를 삼아 곧 전장으로 향하게 하였다.
새로 순변사가 된 이 일은 곧 발정하려 하였으나 데리고갈 군사가 없었다.
일병조의 선병안(選兵案)을 드리라 하여 보니. 대부분은 시정(市井). 백정(白丁).
서리(胥吏) 따위로. 양반의 자제. 돈 있는 사람의 자제들은 이 핑계 저 핑계로 탈을 하고 빠지려고만 하였다. 이 일이 명을 받은 지 삼일이 되어도 군사가 모이지 아니하니 하릴 없이 이 일은 손수 부하를 데리고 먼저 발정하게 하고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군사를 모집하여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였다.
이일이 서울을 떠나매 조정에서나 민간에서나 잠시 안심이 되었다. 그는 이 일이 명장이라는 이름을 믿은 것이었다. 그러나 밀양이 함락되었다. 경주가 점령되었다 하는 경보가 연해 오고 종남산 봉수에 세 자루의 봉화가 아니 들리는 날이 없을 때에 서울의 인심은 물 끓듯 하였다.

이순신 - 05 (01~05)

1

도체할사 류성룡은 신입(申砬)을 불러서 계획을 물었다. 신입은 이 일과 아울러 당대 명장이었다.
『대감은 무신이 아니니까. 쓸 만한 장수를 가리어서 이 일의 뒤를 돕게 하시는 것이 양책이지요.』
하고. 신입은 자기가 나서고 싶은 뜻을 보였다.
『적군을 막을 방략이 있소?』
하고. 류성룡이 물으매. 신입은 자신 있는 듯이 웃으며.
『당대 명장 신 입이 적군을 못 무찌르면 살아서 돌아오지는 아니하겠소.』
하고. 장담하였다.
류성룡은 그 뜻을 장하게 여겨서 곧 병조 판서 김응남과 함께 왕께 뵈옵고 신입으로 도순변사를 하시기를 청하였다.
신 입은 독자도 기억하시려니와 수군 전페 논자다.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극히 악한 계획을 세우는 데 가장 일을 많이 한 사람이다. 제긍 방략이라는 것은 일본군과 싸우는 데는 바다에서 마지 말고 육지에 상륙시켜 놓고 싸우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군은 수전에 익으니 수전으로는 당하기 어려운즉 육지에 끌어 올려 놓고 우리 편에서 능한 육전으로 싸우자는 데 있다.
이 제승방략이라는 것이 조정에서 결정되매. 의주 목사 김 여물(金汝岉)을 적을 바다에서 막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육지에 내리는 길에도 막지 아니하고 내지로 끌어 들여서 싸운다는 것이 무슨 어리석은 소리냐 하고 분개하다가 묘의를 비방하였다는 혐의로 급부에 갇히기까지 하였다.
신입이 도순변사의 명을 받아 가지고 길을 떠나려 하여 왕께 하직 숙배를 할 때에. 왕은.
『경은 무슨 계교로 적군을 막으려 하나뇨?』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신입은.
『염려 없소. 적이 용병할 줄을 모르오.』
하고. 아뢰었다.
『무엇을 보고 적이 용병할 줄을 모른다 하는가?』
하는 왕의 두 번째 물음에 신입은.
『적군이 부산에 내리는 길로 내지로 들어오기만 힘쓰니. 외로운 군사를 끌고 깊이 들어 가서 패하지아니하는 자가 없소. 이런 것을 모르는 적군이니 두려울 것이 없는 줄로 아뢰오. 소신이 재주 없사와도 불출 순일에 적을 평정하겠사오니 상감 염려 부리시오.』
하고. 극히 쉽게 대답하였다. 왕은 못마땅히 여기는 빛으로.
변협이 맹양 이르기를 『(邊協) 왜가 가장 어렵다 하거든 경의 말이 어찌 그리 쉽느뇨. 삼가라.』
손수 보검을 신입에게 주며.
『이 일 이하로 명을 좇지 아니하는 자가 있거든 이 검을 쓰라.』
하였다. 왕은 신 입을 보내고 그의 경솔하고 생각이 깊지 못함을 근심하여 여러 번 변협(邊協)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신입은 빈청에 나와 영의정 이 산해.
좌의정 류성룡. 우의정 이양원 등에게 하직하고 바로 계하에 내리겨 할 때에 웬일인지 신입의 머리에 쓴 사모가 땅에 떨어졌다. 사모를 다시 쓰고 의기양양하게 길을 떠났으나 이것을 본 사람들은 다 불길한 징조나 아닌가 하여 실색히였다.

2

순변사 이일. 도순변사 신 입을 적군이 오는 곳으로 파견한 조정과 서울 백성들은 날마다 첩보(싸움에 이겼다는 기별)오기만 기다렸다.
어 문경을 지나 사월 이십 이일에 경상도 상주목(尙州牧)에 도달하였다. 이 일이 상주에 온 까닭은 이러하다.
부산서 서울로 오는 데는 길이 셋이 있으니. 이것을 삼로하고 한다. 일찌기 대장 변협이.
『(...(되와 왜가 세 길 형세를 잘 아니 앞날 근심이 말할 수 없다.)』
고 한 「세 길」이란 것이 이것이었다. 과연 일본군은 삼로의 형세를 잘 알아서 군을 셋으로 갈라 제 일군은 소서행장(평행장 평이란 성은 그때 일본 장수는 누구나 일컫는 것이었다.)이 주장되고. 이군은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주장이 되고. 제 삼군은 혹전 장정(惑田長政)이 주장이 되었다. 그로매 rmfojt 이미아는 바와 같이 제일군인 소서행장의 군사는 사월 십 삼일에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 동래.
양산. 밀양. 청도를 거쳐 지금 순변사이 일이가 막으려는 상주(尙州)로 향하니 이것이 가운데 길이요. 제 이군인 가등청정군은 사월 십 칠일에 부산에 상륙하여 왼편 길로 향하고. 제 삼군인 혹전 장정군은 사월 십구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내려 김해를 점령한 것이니. 이것이 오른편 길로 향한 것이다.
가운데 길이라 함은 부산에서 양산(梁山). 밀양(密陽)청도(淸道). 대구(大邱).
인동(仁同). 선산(善山)을 거쳐 상주(尙州). 문경(聞慶)을 지나 새재(새재)를 넘어서 서울로 오는 길이요. 왼편 길이라 함은 곧 경상 좌도의 길이라는 뜻이니.
부산에서 기장(機張). 울산(蔚山). 경주(慶州).영천(永川). 신녕(新寧). 의 홍(義홍 )을 겨쳐 용궁강(龍宮江)을 건너 대재(㐲載)를 넘어서 서울로 어는 길이요. 오른편 길이라 함은 주로 경상 우도의 길이란 말이니. 김해에서 성주(星州). 무현(茂縣)강을 건너지례(知禮). 김산(金山)을 거쳐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충청도 영동(永同)을 지나서 서울에 오는 길이다. 이제 이일은 이세 길 중에 가운데 길로 적군이 올 것을 예상하고 상주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상주에 들어 온다는 사월 이십 이일데 그를 나와 맞는 이는 오직 상주 판관(尙州判官) 권 길(權吉)뿐이었다.
『목사(牧使)는 어디 가고 아니 나왔느냐?』
하고. 이 일은 판관 권 길을 보고 호령하였다. 이 일은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희나. 눈초리가 우으로 찢어지고 . 목소리가 크고. 과연 장수의 위엄이 있었다. 더구나 이날은 영남의 거진인 상주목에 도달하는 날이라 하여 중로에 함창(咸昌)에서부터 갑주에 위의를 갖추어 그 위엄이 만군을 누를 듯하고 수종하는 제장들도 그와 같았다. 판관 권 길은 두려움을 보이며.
『사또께서는 상사또 지영한다 하옵고 아침 일찍 군사 이백명을 다 데리고 함창으로 간다 하옵고 떠났소.』
하고. 아뢰었다. 과연 권 길은 영문 장교. 군노 수십 명을 거느렸을 뿐이었다.
『목사가 나를 맞으러 떠났어?』
하고. 순변사는 일변 노하고 일변 의심하였다.
『과연 그러하오.』
하고. 판관 권 길은 사실대로 아뢰인 것이다. 상주 목사(尙州牧師) 김해(金海)는 이 일을 맞으러간다 칭하고 군사 이백명을 거느리고 상주 서문을 나갔으나 중로에서 군사들을 쉬라 하고 김해는 단기로 잠간 다녀 오마 하고는 어디로 가 버리고 말았다. 군사들은 목사가 낮이 기울도록 아니 돌아 오는 것을 보고는 난을 일으켜 병기를 가진 채로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3

『군사는 다 어찌 되었느냐?』
하고. 순변사 이 일은 더욱 노발이 충관하였다.
『군사 없는 것은 상주만이 아니요. 영남 각 읍에 군사라고 있는 것은 더러는 대구로 가옵고. 더러는 상사또 내려 오시기를 기다리다 못하여 흩어져 산으로 달아나옵고. 어느 고을에 가든지 남은 백성이라고는 늙은이나 병신뿐이오니 상주에 군사 없는 것이 소인의 죄가 아니요.』
하고. 판관 권 길은 굴지 않고 말하였다. 권 길의 말은 사실이었다.
진관제 가(鎭官制) 페하고 각읍 군사가 도원수부(都元帥府)에 속하게 된 뒤로는 도원수부에서 주장이 내려 오기 전에는 각읍 군사는 무장지졸이 되엇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산 동래가 적군에게 함몰되었다는 기별을 듣고 영남 각읍에서는 소속 군사를 혹은 백. 혹은 이백씩 모아 놓고 기다렸으니 십여 일이 되어도 장수는 오지 아니하니 부득이 더러는 대구 감영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새로 난 순변사이 일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이 일이가 서울서 군사가 모집되지 아니하여서 삼일을 지체하는 동안에 다 흩어져 피난을 가고 만 것이었다. 그때 군사 제도로 말하면 오늘날 징병 제도와 같아서 남자로 낫 정년에 달하면 누구나 양반이나 상놈을 물론하고 국족까지도 군사가 되는 제도였지만. 이백년 태평으로 내려 오는 동안에 제도가 해이해져서 양반의 자식.
돈 있는 자의 자식은 거짓 병신도 되고 늙은 부모의 외아들로 호적을 고치기도 하여 군사에 빠지고 오직 미천한 사람만이 군사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권 길의 말이 옳지마는 군사가 흩어진 책임을 이일에게 들리는 것이 괘씸해서 이일은.
『판관을 내어 베이라.』
하고. 호령을 하였다. 군노들은 판관 권 길에게 달려들었다. 권 길은 잠간 할말이 있다 하고 이 일에게.
『소인이 죽기는 아깝지 아니하오마는 소인마저 죽으면 상사또는 군사 한 명 없이 무엇으로 적군을 막으시려오? 소인도 오래 국은을 받았으나 만일을 갚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이 되오. 오늘 밤만 소인을 살려 두시면 천명 군사 하나는 모아 보리다. 그러거든 내일 아침에 소인을 죽이셔도 늦지 아니하오.』
하였다. 이 일은 권 길의 말을 좇지 아니할 수 없었다. 권 길은 이날 밤에 상주의 육방 관속을 총출동을 시켜서 인근 사십리 이내에서 모두 구백명의 군사를 모집하였다.
군사라야 아무 조련도 받아 보지 못한 농부들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아직도 기운이 다 죽지 아니하여 서울서 큰 장수가 왔단 말을 듣고 모여 든 것이었다.
이 일은 상주에서 달아나고 남은 기생을 셋이나 한꺼번에 수청을 들여 밤을 새우고 아침 늦게야 벌겋게 된 눈을 가지고 일어났다.
권 길은 새벽부터 대령하고 있다가 이 일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곧 구백여 명의 군사 명부를 드렸다.
낮이 지난 뒤에야 이 일은 갑주에 위의를 갖추고 취병장에 나와서 신모군을 검열하고 부하를 시켜 그들에게 활 쏘기와 칼 쓰기 창 쓰기며. 법대로 지퇴하는 방법을 조련하기를 명령하고. 판관 권 길을 불러 이렇게 군사가 있으면서도 미리 모아서 조련하지 아니한 것을 책망하고 공사 태만한 죄로 장 팔십에 처하였다.
이것이 목사 김해의 책임일지언정 판관 권 길의 책임은 아니었다. 이 일의 이 처분을 보고 권 길이하로 다순변사의 밝지 못함을 원망하였다.

4

권 길은 군사를 모집한 것이 도리어 죄가 되어서 장 팔십을 얻어맞았다.
군사를 조련할 때에도 이 일은 군사를 사랑하는 정이 조금도 없고 군사를 대하기를 마치 개 돼지 대하듯하여 한나절 동안에 두 사람이 베임을 당하고 매를 맞은 군사는 수효를 몰랐다. 마치 장난삼아 사람을 죽이고 때리는 듯하였다. 군사를 조련하여 날이 거의 석양이 된 때에 개녕(開寧)사람 하나가 달려 와서 일본 군사가 선산(善山)을 점령하였다는 기별을 전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 일은 그 개녕 사람을 불러서 앞에 세우고.
『네 이놈. 죽일 놈! 십 사일에 일본 군사가 동래에 왔다 하거든 아무리 빨리 오기로 청도. 경산. 대구. 인동은 다 어찌하고 벌써 선산에를 온단 말이냐. 이놈 헛소문을 내어서 인심을 소동하는 놈이다.』
하고. 곧 목을 베어 효시하라고 명하였다. 개녕 백성은 적군이 선산에 들어온 것을 보고 그래도 이 기별을 하루라도 속히 순변사에게 알리고자 하여 허위 단심으로 와서 고한 것인데 도리어 죄가 되어서 목을 잃게 되었다. 그는 땅에 엎드려 이일을 향하여.
『소인이 추호인들 거짓 말씀을 아뢸리가 있소. 하루 동안 소인을 살려 두셨다가 만일 내일 안으로 일본 군사가 상주에 들어오지를 아니하거든 그때 죽여 주시오.』
하였다. 이 일은 웃고 그 개녕 백성을 내려 가두라 하였다. 이튿날 상주 판관 권 길이 새로 모집한 군사 구백여 명은 쥐와 좀이 먹다가 남겨 놓은 낡은 군복을 입고 머리에는 퍼런 수건을 동이고 전통을 메이고 활을 들고. 칼 차는 자는 칼을 차고. 창 드는 자는 창을 들고 그래도 제법 군사답게 차리고. 그중 경군과 토군 합하여 한 삼백명 가량은 말을 타서 마병이 되었다.
이 일은 이날 이십 오일 늦게 일어나서 가주에 순변사북문 밖 천변에서 구백명 군사를 버려서 책에 있는 대로 진법을 연습하였다. 종사관 윤 섬(從事官 尹暹). 박호(朴虎). 매 맞은 판관 권 길 등이 뒤에 옹위하고 서기 양양하게 군사들을 검열하였다.
겸열이 끝난 뒤에 어제 저녁에 잡아 가두었던 개녕 백성을 잡아 내어 목을 베어 높이 매어 달아 다시 적군이 온단 말로 민심을 소란케 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아직도 개녕 백성의 모가지에서 흐르는 피가 굳기도 전에 웬 검은 옷 입은 사람 두엇이 북천이라는 냇가 수풀 속에서 이쪽을 엿보고 달아나는 것을 군사들도 보고 이 일의 막하도 보고. 그것이 일본 군사의 척후인 줄도 짐작하였으나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상주성 중에 연기 기둥이 일어나고 뒤이어 화광이 나니. 그제야 이 일도 의심이 나서 군관 하나를 시켜 가서 성중의 모양을 알아 보라고 하였다.
군관이 말을 달려 북문을 향하고 가기를 얼 말하여 북천 내 굽이를 건너는 다리에 다다랐을 때에 총소리 콩 볶는 듯 일어나며 순관이 말에서 떨어지더니 다리 밑으로서 일본 군사 한 명이 뛰어 나와 군관의 목을 잘라 가지고 들어가 버린다.
이것을 보고야 비로소 이 일도 개녕 백성의 말이 옳은 줄 알고 놀랐으나 벌써 손쓸 새도 없이 수없이 일본 군사가 고함을 치고 조총을 난사하며 엄습함을 당하였다.

5

일본군은 선봉대로 조총대 수십 명으로 하여금 관군의 전렬을 엄습하게 하고 진을 좌우익으로 나누어 관군을 포위할 형헤르 보였다.
이 일은 곧 영을 내려 군사고 하여금 활을 쏘게 하였으나 한두 나절 밖에 활쏘기를 배우지 못한 군사들의 화살은 멀리도 가지 못하고 견양한 대로도 가지 못하고 함부로 날랐다. 이것을 본 일본 군사들은 이거 웬 떡이냐 하는 듯이 조총을 놓으며 몰려 들어왔다. 그래서 앞줄에서 싸우던 군사 수십 명이 순식간에 총을 맞아 넘어졌다. 순변사 이 일은 이 모양을 보고 말을 채쳐 뒤러 달렸다.
『사또. 어디로 가시오?』
하고 윤 섬. 박호 등이 따라서니 이 일은 뒤로 돌아 볼 사이 없이.
『자네들고 따라 오게. 따라 와.』
하고 그 좋은 백달마의 강철 같은 말굽으로 안개같이 먼지를 찼다.
『이놈이 일아!』
하고 윤 섬이 이 일의 등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네놈이 받은 국은이 망극하거든 이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면 무슨 면목으로 돌아 가 주상께 뵈오려느냐. 남아가 이때를 당하여 한번 죽으면 고만이지 도망이 말이 되느냐. 다들 나를 따라라.』
하고. 말을 채쳐 적군을 향하여 달려갔다. 군사들 중에는 윤 섬을 따라서는 이도 있었으나. 하늘같이 믿었던 대장 이 일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는 대부분이 활과 칼을 던지고 달아났다. 윤 섬도 죽고. 판관 권 길도 죽고. 변기(邊璣)의 종사관 이 경(李慶)도 싸워 죽었다.
일본 군사들이 이 일의 뒤를 따르니 이 일이 황굽하여 자기가 이 일인 것을 숨기기 위하여 마상에 앉은 대로 갑주를 벗어 버리고. 나중에는 탔던 말까지도 내어 버리고. 그래도 급하게 되니 입었던 옷을 벗고 촌가의 바자에 빨아 널었던 헌 잠방이 하나를 훔쳐 입고 머리를 풀어 산발을 하고 엎어지며 자빠지며 산속.
수풀 속으로 도망하여 밤중에 새재를 넘어 이튿날 아침에 충주(忠州)에 들어 가도순변사(都巡邊使) 신입(申砬)의 진에 들었다. 이때에 도순변사 신 입은 열도 병마 삼찬여를 거느리고 흐기 당당하게 충주에 내려와 충주성 북단월역(丹月曆)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 일과 변기가 패하여 도망해 온 것은 선봉을 삼아 공을 세워 죄를 속하기로 하고 종사관 전 의 주 목사 김 여물. 조방잔 충주 목사(忠州牧師)등 여러 장수가 있었다.
일본군이 금명간에 조령을 넘어 온다 하면 어떻게 막을까 하는 데 대하여 두 가지로 의론이 갈렸다. 하나는 도순변사 신 입의 주장이니. 일본 군사가 조령을 넘어 충주 평야에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기병으로 이를 깨뜨리면 반드시 이기리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종사관 김여물. 조방장 이 종장 등의 주장이니.
관군은 적고 적군은 많은즉. 마땅히 새재를 지켜 군사를 수풀 속에 숨기고 깃발과 연기를 많이 보여 적으로 하여금 관군이 얼마나 되는지를 의심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 입은 김 여물과 이 종장 등 수뇌부를 데리고 새재의 형세를 살피기까지 하였으나 자기의 주자을 고집하여 새재를 버리고 단월역에 본진을 두고 적군이 충주 평야에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싸우기로 하였다. 주장이 하는 일이니 김여물이나 이 종장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