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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 04 (01~02)

1

상현이 팔과 다리와 목을 잘리어 죽은 뒤를 이어서 부사와 같이 있던 비장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稀壽). 향리 송 박(宋迫). 상현을 따라다니던 신 여로(申汝櫓) 등도 항복하지 아니하고 주장의 곁에서 같이 죽었다.
이일이 끝난 뒤에 적군의 대장 평 의지(平의지)와 일본 중으로서 조선에 여러 번 사신으로도 다니고 임란을 통하여 소서행장의 군중을 떠나지 아니한 현소(玄蘇)가 와서 송상현을 찾으니. 부하가 그 참혹한 여러 시체를 가리키며 이 속에 있다고 하였다.
『죽기전에 무슨 말이 없더냐?』
하고. 평 의지가 물으니. 부하가.
『이것이 이웃 나라의 도리냐? 우리 나라가 너희 나라를 배반한 일이 없거든.
네 어찌 우리를 배반하느냐. 하더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평의지는 송상현의 시체를 수습하여 동문 밖에 장사하게 하고 남편을 따라 죽은 상현의 첩 김 섬(金纖)도 그 곁에 묻게 하였다. 이렇게 동래성이 함락된 뒤로는 일본군은 거의 아무저항이 없이 서울을 향하고 올라 갔다.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 윤홍신(尹洪信)이 그 아우 홍제(洪梯)와. 함께 죽고.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이 동래를 구하러 갔던 길에 황산(黃山)에서 적군을 막으려 하였으나 소서행장. 송포 진신(松浦鎭信)등의 군사에게 패하여 군관 이 대수(李大樹). 김효우(金孝友)와 군사 삼백여 명을 잃고 밀양(密陽)으로 도망하였으나 그것도 지키지 못하여 군기와 창고를 불사르고 산으로 달아나고. 동래를 버리고 달아난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 이 각(李珏)은 동래가 위태하여 운명이 경각에 달린 것을 보고는 소산(蘇山)을 버리고 군사를 끌고 병영(兵營)으로 달아 돌아 와 인마를 발하여 그 사랑하는 첩과 무명 일천 필을 서울 집으로 실려 보낼 제 그것을 반대한다 하여 진무(鎭撫)를 베었다. 밤에 병영 안에 경동이 일어가기를 사오차나 하였으나 대장인 이 각이 그것을 진정하지도 못할 뿐더러 새벽을 타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에 병영에는 십 심 읍의 군사 오만여 명이 모여 있었다. 이 각이 달아나려는 것을 보고 안동 판판 안 성(安東판判安性)이 그 불가함을 책한즉.
그러면 그대는 제장으로 더불어 성을 지키고 그대의 정병을 나를 달라. 내 나아가 서산(西山)에 진을 치었다가 적이 오거든 내외 협공하자 하였다. 안 성이 그 말을 좇았더니 이 각이 서문으로 나아가 태화강(太和江)을 가리키며.
『이놈들아. 적군이 벌써 저기 온 줄을 몰라.』
하고 말을 채쳐 달아났다. 단 성이 이 각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칼을 만지며 분개하였다.
병사의 우후 원 응두(元應斗)가 또 성 밖에 나가기를 청하는 것을 안 성이 소리를 높여.
『내가 이 각이 놈을 못 베인 것이 한이어든. 네놈도이 각이 놈을 본받아 달아나려느냐.』
하니. 응두가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얼마 아니하여 달아났다. 그뒤를 따라 장수들과 관리들이 다투어 달아나니. 병영에 모이었던 십 삼 읍 오만 대군이 한번 싸워 보이지도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김해 부사(金海府使) 사 예원(徐禮元)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고.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 유검(李惟檢)이 달아 나고.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조 대곤(曺大坤)이 영문을 버리고 달아나고. 경상 감사 김수(金脺)가 군사를 거느리 고진주에 있어서 동래와 부산을 성원하려다가. 동래. 부산이 함락되었단 말을 듣고는 군사를 버리고 영산(靈山)으로 달아나고. 여러 고을들이 이어 함락된다는 소문을 듣고는 영산에서 합천(陜川)으로 달아나고. 또 합천에서 지례(知禮)로 달아나고.
그리고도 달려온 초계 군수 이 유검을 만나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난 죄로 유검을 베었다.
경주부(慶州府)는 언양(彦陽)으로 질러 온 가등청정(加藤淸正)군에게 포위되어 부윤 윤인(尹仁)은 마침 없었고. 판관 박의(朴毅)와 장기 현감(長鬐䝮監)이 수일(李守一)이 싸우지도 아니하고 달아나 버렸다.

2

부산 함락의 경보가 서울에 올라 온 것은 사월 십 칠일이었다. 이것은 달아나기로 첫째인 경상 좌도 수군 절도사 박홍(朴泓)이 달아나면서 보낸 장계다.
『부산진에 연기 나고 붉은 기가 찼아오니 아마 적군이 들어 온 모양이로소이다.』
한 것이었다. 이 경보를 듣고 왕은 이것이 다 김 성일(金誠一)이 일본을 다녀 와서 보고를 잘못한 것이라 하여 우선 김 성일을 잡아 올리라 하였다. 이때에 김 성일은 경상 우도병마 절도사가 되j 부임하는 길에 있었다. 정진(鼎津)을 건너 해망원(海望原)에 이르러서 성을 버리고 도망해 오는 갈린 병사 조 대곤(曺大坤)을 만나서 인과 병부를 받았다. 그리고 성일이 함안에 이르렀을 때에 나명을 받은 것이다.
성일이 갈리고 조 대곤이 다시 병사가 되었으나 적군이 온단 말을 듣고 다시 달아났다 왕은 부산 동래가 .. 함락되고 적군이 무인 지경같이 내지로 들어 온단 말을 듣고 심히 놀래어 곧 영의정(領議政)이 산해(李山海). 좌의정(左義政) 류 성룡(柳成龍). 우의정(右議政) 이 양원(李陽元) 등을 불러 방어할 계책을 물었다.
그러나 삼 대신은 맥맥히 서로 볼 뿐이었다.왜 그런고 하면. 그들은 다 일본군이 오지 아니한다고 보아 양병을 반대한 자들일뿐더러. 서울에는 군사라고는 명색뿐이요. 정말 싸울 만한 것은 없었음이었다.
정부 대신과 비변사(備籩使)를 삼아 중로(가운데 길)를 지키게 하고. 성응길(成應吉)로 좌방어사(左防漁使)삼아 좌도로 보내고. 조경(趙敬)으로 우 방어사(右防禦使)를 삼아 서로(서쪽 길)로 보내고. 유극량(劉克良)으로 하여금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로 하여금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변응성(邊應星)으로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삼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군사는 없으니까 저마다 모집을 해 가지고 가기로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왕은 좌의정 류성룡을 신임함이 자못 두터워 류 성룡의 계책을 들어 병조 판서(兵曹判書) 홍여순(洪汝諄)을 갈고 김응남(金應南)으로 대신케 하고.
심충겸(沈忠謙)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삼으니. 이는 일굴 병마의 권을 류 성룡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병마의 최고 감동권을 주었다. 류 성룡은 병조 판서 김응남으로 부체찰사를. 옥에 갇혀 있던 전 의 주 목사 김 여물(金汝朆)을 특사하여 수원을 삼기를 청하고. 당대 명장으로 누구나 첫 손가락을 곱는 이 일(李鎰)로 순변사(巡邊使)를 삼아 곧 전장으로 향하게 하였다.
새로 순변사가 된 이 일은 곧 발정하려 하였으나 데리고갈 군사가 없었다.
일병조의 선병안(選兵案)을 드리라 하여 보니. 대부분은 시정(市井). 백정(白丁).
서리(胥吏) 따위로. 양반의 자제. 돈 있는 사람의 자제들은 이 핑계 저 핑계로 탈을 하고 빠지려고만 하였다. 이 일이 명을 받은 지 삼일이 되어도 군사가 모이지 아니하니 하릴 없이 이 일은 손수 부하를 데리고 먼저 발정하게 하고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군사를 모집하여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였다.
이일이 서울을 떠나매 조정에서나 민간에서나 잠시 안심이 되었다. 그는 이 일이 명장이라는 이름을 믿은 것이었다. 그러나 밀양이 함락되었다. 경주가 점령되었다 하는 경보가 연해 오고 종남산 봉수에 세 자루의 봉화가 아니 들리는 날이 없을 때에 서울의 인심은 물 끓듯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