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처음에는 매우 거만하던 금부 관원도 백성들이 이렇게 서두르는 양을 보고 겁이 나서 순신에게.
『대감. 살려 줍시오!』
하고 순신에게 빌었다. 그리고 떨었다. 순신은 우후 이 몽귀(李夢龜)와 순천 부사 권준(權俊)과 조방장 어영담(魚泳潭)을 불러 순사들과 백성들을 진정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간성을 믿고 자기네의 부모와 같이 존경하고 흠모하던 이 순신이 이처럼 항쇄. 수갑에 상투를 풀어 뒤로 젖히고 옷고름을 풀어 헤친 욕된 모양을 보고는 순사들은 비록 순령을 지켜서 잠잠하나 백성들의 울분은 풀리지 아니하였다.
금부 도사는 겁을 내어 순신의 결박을 끄르라 명하고 다시 순복을 입히려 하였으나 순신은 듣지 아니하였다. 왕명으로 맨 결박을 왕명이 아니고 누가 끄르느냐 하였다.
그날 밤을 금부 관원 일행은 떨며 지나고 이튿날인 정월 이십 육일에 금부 도사는 순신의 앞에 공손히 읍하고서서.
『대감 어찌하오리까?』
하고 처분을 물었다.
『가자!』
하고 순신은 나섰다.
제승당 앞에는 백성들이 모이고 앞바다에는 이 소문을 들은 이웃 백성들이 부로 휴유하고 배를 타고 모여 들었다.
순신이 나졸에게 끌려 제승당 층계를 내릴 때에 백성들은 뜰에 엎디어.
『대감 못 가시오! 우리를 버리고 어디를 가시오?』
하고 울며 길을 막았다.
그중에서 늙은이 하나가 금부 도사 앞에 나와.
『우리 조선을 누구의 힘으로 보전하였소. 우리 통제사 대감이 아니시면 오늘날 상감께선들 서울에 돌아 오실 수가 있으며. 여러 양반네들인들 편안히 앉아서 호강을 할 수 있겠소. 이제 통제사 대감을 잡아 가시면 사흘이 못하여 경상. 전라도는 적병의 판이 되지 아니하겠소. 통제사 대감이 무슨 죄가 있소. 이 어른이 죄가 있다 하면 나라를 안보하고 백성을 죽을 곳에서 때어 낸 죄밖에 어디 있소? 접때에 남 어사(남 이신을 가리킨 말이다)가 내려 와서 대감이 무슨 잘못하신 것이 없느냐. 하길래 우리 백성은 그렇게 말하였건마는 도시 이것이 웬 일이란 말이요? 하니 사또(금부 도사를 부르는 말)께서도 서울 올라 가셔서 상감께 우리 백성들의 말을 삼고 통제사 대감을랑 잡아 가지 마시오.』
하고 간곡하게 말하였다 다른 백성들은 이 노인의 말이 옳다는 듯이 물그러미 금부 관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부 관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부 관원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대감 어찌하면 좋소?』
하고 순신을 바라보았다.
순신은 고개를 들어 백성들을 바라보며.
『상감께옵서 명이 계시니 아니 갈 수 없소. 부로들의 정성은 고마우나 이렇게 길을 막으면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니 이것이 가장 옳지 못한 일이요.』
하였다. 백성들은 이러한 일에도 순신의 말을 믿고 복종하였다. 그들은 길을 열어 순신이 걸어 나갈 곳을 내고 오직 순신의 뒤를 따라서 선창까지 가며 울었다. 마침내 순신은 배에 올랐다. 순신이 잡혀 가는 배가 한산도에서 떠나서 고성(固城)을 향하고 나갈 때에 바다에 지키고 있던 병선과 민선에서는 일제히 통곡 소리가 일어났다. 금부 관원들은 육지에 내릴 때까지 혼이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몇 번을 많은 민선에 포위되어.『우리 사또를 왜 잡아 가느냐?』고 힐난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금부 관원들은 순신에게 어찌하려고 빌었다. 순신은 왕명을 순종하는 것이 신자의 도이라고 타일러서 해산시켰다.
그러나 육지에 내려서부터는 금부 관원들은 순신에게 대하여 대단히 거만하게 되었다.
더구나 경상도 지경을 벗어나서부터는 순신을 걸음이 더디다고 철편으로 때리기까지 하였다 입으로 . 퍼붓는 모욕의 언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도중에서 혹시 잉 가엾은 죄인이 이 순신인 줄 아는 사람은 읍하여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술 한잔을 대접하기를 청하기도 하였으나 금부 관원들은 일체 듣지 아니하였다.
연로 수령들도 순신의 대역 죄인으로 대우하고 누구 하나 은근한 호의를 표하는 이도 없었다.
이 모양으로 궁흉극악한 죄인의 형상으로 이월 초 삼일에 남대문을 들어 왔다.
27
순신은 이월 초 삼일에 서울에 들어 와 그날 밤을 금부의 찬 방에서 큰 칼을 쓰고 지내고. 이튿날인 초사일에 좌의정 윤근수(尹根壽)가 왕명을 받아의정부에서 제일차로 이 순신을 국문하였다.
이날 끌리어 금부를 나와 황토 마루를 지나 정릉골(지금정동)의 정부로 올 때에 길가에는 백성들이 수만 명이 한산도에서 일본 수군을 전멸시킨 무서운 장수 이 순신을 본다고 식전 아침부터 모여 들었다. 혹은 이 순신이 일본 사람을 끼고 역모를 하다가 붙들려 온 것이라 하는 이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krstls들이 이 순신의 공을 미워하여 무함하여 죽이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신들이 아침에 잠을 깨는 것은 하나절이 지나서였기 때문에 이 순신이 의정부로 끌려 온 것은 지금으로 이르면 열 한시나 되었다.
이 순신은 머리에 굵게 바자루를 써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고 오직 큰 칼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두 손을 잔뜩 등 뒤로 비그러 붉은 오라로 결박을 지우고 저고리 고름은 뜯어 걸음을 걷는 대로 앞자락이 펄렁거려 흰 가슴이 보였다.
바지를 잔뜩 치켜 입혀서 고의춤이 늘어지고 정강이가 반이나 드러나고 발은 벗겨서 맨발로 아직 언 땅을 밟았다.
호송하는 나졸들은 까닭도 없이 가끔 철편을 들어 순신의 어께와 등을 후려 갈겼다. 그러할 때마다 순신은 한 걸음씩 쉬었다.
황토 마루에 이르렀을 때에 무슨 생각이 났던지 나졸은 철편으로 순신의 앞 정강이를 후려 갈겨서 순신은 앞으로 쓰러질 듯 무릎을 꿇었다. 등에 떨어지는 둘째 철편에 순신이 다시 일어날 때에는 두 정강이는 터져서 피가 흘러 내리고 땅에 닿았던 자리에는 꺼멓게 흙이 묻었다.
이것을 보고 모여 섰던 백성들 중에 어떤 사람이순신에게로 내달으며.
이놈들아 충신을 『 . 때려 피를 흘리느냐. 그 철편을 나를 다오. 충신을 무함하는 간신 놈들의 대가리를 바술 터이다.』
하고 날뛰었다. 그 사람은 패랭이를 쓴 사십 남직한 사람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군종들은.
『충신을 살려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순신을 호송하는 나졸들은 이 패랭이 쓴 사람을 철편으로 두들겨 잡았다. 그는 거진 다 죽어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길에 넘어진 것을 나졸 두 명이 죽은 개 끌 듯 상투를 끌고 포청으로 향하고 가닫가 백성들이 소리를 치는 바람에 내버리고 두 나졸은 달아나 벼렸다.
이 일이 생긴 뒤에은 순신은 더 얻어 맞지를 아니하고 의정부까지 갔다.
영의정 류성룡은 순신을 천한 천한 사람이라 하여 이 자리에 참여하지 아니하고. 우의정 이원익(李元翼)은 순신을 두호한다 하여 또한 기피를 당한 것이었다. 그 제 일회 국문은 이러하였다.
『저는 국은이 지중하거든 어찌해서 이심을 품고 적의 뇌물을 받고 적장 청종을 놓쳤느냐?』
하는 것이 첫 질문이요. 또 순신의 죄의 요령이었다. 국문하는 윤근수는 대신의 관복을 입은 키가 자그마한 사람이나 소리는 컸다. 나이로 말하면 순신과 비등하였다.
『소인이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부족하여 적을 막지 못한 죄는 만사무석이 오마는 적장에게서 뇌물을 받은 일은 없소.』
하는 것이 순신의 첫 대답이었다.
28
『너는 또 이번 금부 관원이 교지를 받들고 너를 잡으러 내려갔을 때에 거만하게 관원을 욕하고 또 부하군을 군졸을 출동하여 관원에게 폭행을 시키려 하였다. 하니. 네 죄를 알겠지?』
하는 것이 둘째 질문이었다.
『그런 일은 없소.』
하고 순신은 간단히 부인하였다.
『금부 관원이 당하고 와서 보한 말인데 없대?』
하고 근수의 말은 거칠었다. 그러나 순신은 이런 말 같지 아니한 말에 변명하려고도 아니하고 입을 다물었다.
첫날 국문은 이러한 대체 말로 그치고 말았다. 윤근수도 순신이 죄 없음을 속으로는 안 까닭이었다.
조정에서는 첫날의 국문이 철저치 못함을 공박하는 의론이 높았다. 순신과 같이 임금을 속이고 적에 매수를 당하며 조국을 파는 악인은 마땅히 정강이가 부러지도록 악형을 하여야 실토를 하리라고들 떠들었다.
윤근수는 자기가 원치 핞은 일을 맡게 된 것을 한하였다. 그러나 내약한 그는 여론에 밀려 가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공평한 체하는 태도를 취하여 순신에게 유리하게 하였다가는 자기마저 순신과 함께 몰릴는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윤근수는 첫날 국문에서 이순신의 위인을 간파하였다. 그의 당당한 태도.
자기를 위하여 변명하지 아니하는 태도는 윤근수뿐 아니라 모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두려워하는 생각을 발하게 하였다.
이튿날은 모든 악형하는 기구를 준비하고 순신의 제이회 국문이 개시되었다.
단근질 하기 위하여는 숯불 피운 화로와 인두가 준비되고 여러 가지 오하와 곤장과 주리 틀 제구와 갖은 형틀이 준비되고 좌우에는 금부나장. 나졸 중에도 감판 사납고 악형으로 이름난 사람들을 들여 세웠다.
이날은 임진년에 원균이가 순신에게 청병할 때에 곧 듣지 아니하고 천연한 죄로부터 국문을 개시하였다.
『원균이가 네게 청병할 때에 너는 어찌해서 곧 응하지를 아니하였어?』
하는 질문에 순신은.
『조정에서 아직 명이 아니 계셔서 그리하였소.』
하고 자기가 천연한 것이 조됨을 자백하였다.
『당포. 당항포. 한산도 여러 싸움에 원균이 매양 수공이어든 어찌해 다 네 공인 것같이 위에 아뢰어 군부를 속였어?』
하는데 대해서는 순신은 일절 대답이 없었다.
『대답할 말이 없지?』
해도 순신은 대답이 없었다. 이것은 순신이 제 죄를 자백한 것을 기록되었다.
한산도에서 궁궐 같은 집을 짓고 주색에 침윤하였다는 죄상에 관하여소도 순신은 대답이 없었다. 다음에 본 문제에 들어 가.
『어찌해 적장 청정이가 온다는 시일을 알고도. 또 잡으라는 조명을 받고도 나아가지를 않았어? 청정에게서 뇌물을 받고 놓아 버린 것이라지?』
하는데 대하서는 순신은 다른 때와 달라 자세하게 그때 사정을 설명하였다.
첫째는 적의 간자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 둘째는 부산. 울산. 김해에 적의 근거가 있으니 가벼이 망망 대해에 전군을 끌고 나갔다가는 복배 수적할 근심이 있는 것 셋째 그럴듯한 말로. 이편을 유인할 때에는 반드시 무슨 괴계가 있던 것. 넷째 섣불리 적의 괴계에 빠져 전함대를 몰고 나갔다는 그 빈 틈을 타서 적의 함대가 경상. 전라의 바다를 지나 경강을 엄습할 것 다섯째. 적의 병선과 병기와 군사는 수효로 보아 이편의 삼사배가 넘으니 넓은 바다에서 싸워서는 승산이 없고 오직 지리와 조류를 이용하여서만 막아 낼수 있는 것. 일언이폐지하면 지금 우리 형편으로 보면 나아가 큰 바다에서 적과 싸우는 것은 불리하고 가만히 경상. 전라의 바다를 지키는 것이 상책이란 것을 말하였다.
29
둘째 날에도 악형을 아니 하고 말았다. 윤근수는 비록 한두 번 순신을 고문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형세를 느끼지마는 막상 순신을 대하고 순신의 온후한 태도와 조리정연한 말을 듣고는 악형할 용기가 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둘째번 국문에도 순신의 실토를 받지 못하였다 하여 윤근수를 불신임하는 의론의 실토를 받지 못하였다 하여 윤근수를 불신임하는 의론이 비둥 하였다. 그날 밤에 윤근수의 집에는 순신에게 사정을 두지 말고 반드시 청정에게 매수되어 조명을 거역하였다는 죄상을 자백케 하라는 편지와 방문이 수없었다. 그중에는. 「우리 서인(西人)의 부침에 관한 중대사니 일호 사정 두지 말라」하는 협박장까지 들어 왔다.
이튿날인 셋째번 국문에서 윤근수는 자신을 보전할 필요상 순신을 고문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날의 국문의 중심 문제는.
『네가 적장 청정에게 뇌물을 받고 놓아 주었다지?』
하는 것이었다. 순신은 처음에는 부인하였으나 여러 번 물음을 받을 때부터는.
『나는 할 말을 다하였소.』
하고 이내 벌리지 아니하였다. 윤근수는 금부 관원에게 순신을 고문하기를 명하였다. 나졸들은 순신의 상투를 뽑아 잔뜩 뒤짐에 비끌어 매고 주리를 틀기 시작하였다.
순신의 두 다리의 살은 터져 피가 흘렀다. 정강뼈는 휘었다. 그러나 굳게 닫힌 순신의 입은 영원히 닫힌 듯이 열리지 아니하였다.
주리를 틀어도 효과가 없는 것을 보고 단근질을 시작하였다. 뻘겋게 달은 인두는 순신의 넓적다리를 부쩍부쩍 지졌다. 기름이 타고 피가 흘렀다.
순신의 전신은 이길 수 없는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조금도 찌그림이 없었다.
『그놈 훈련원에서 말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도 제 손으로 비끌어 매고 다시 말을 타고 그예 과거를 다 보고야 만 놈이다. 독한 놈이다.』
하고 마침내 윤수는 고문을 중지하기를 명하였다. 그러나 형틀에서 끌어 내릴 때 수신은 긴장하였던 신경이 풀어지는 서슬인지 그만 기절하여 버렸다. 그도 오십 삼세의 늙은 몸이요. 임진년 이래로 육 년간 노심 초사에 많이 몸이 쇠약했을 뿐더러. 중한 열병을 치르고 난 지가 얼마 안 되는 까닭에 이 악형에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순신은 그날 밤에 몸에 열이 나고 전신이 아파심히 고통하였다.
이때에 서울에는 순신의 인아친척과 친지와 예전 그 부하로 있던 사람들도 있었지마는 혹시나 순신이 공초 속에 자기 이름이나 나오지 아니 할까 하여 전전 긍긍할 뿐이요. 아무도 감히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오직 전라 좌수사 이억기(李億祺)가 옥중으로 사람을 보내어 순신을 위문하고 인삼을 두고 달인 미음을 쑤어 들여 순신을 대접하였다. 그도 금부 옥졸 중에 예전 훈련원에서순신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의 알선으로 그러한 것이었다.
이억기의 사자를 보고 순신은.
『다시는 내왕하지 말라. 혐의를 받으리라. 나 하나를 생각지 말고 영감(이억기를 가리키는 말)의 몸을 생각하여라. 내가 죽으면 영감 밖에 수군을 맡을 사람이 없다. 곧 우수영으로 돌아 가 전쟁 준비를 하여라. 경상도와 전라 좌도 수군이 패하고 일본 함대가 전라 우도 바다를 지날 날이 멀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억기의 사자 편에 순신은 충청 병사 원균(元均)이가 순신의 자리에 충청. 전라. 경상. 삼도 통제사가 되어 명일 발정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윤근수는 왕께 순신이 아무리 고문을 받아도 실토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아뢰었다.
왕은 대신과 육조와 삼사의 대관을 불러 순신을 어떻게 처치할까를 물었다.
개왈가참(다 말하기를 순신은 베일 것이요)이라 하였다.
30
이 모양으로 여드레나 두고 계속하여 국문하였으나 순신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순신은 죄를 자복하거나 말거나 실군기(失軍機)라는 죄 하나는 벗을 수가 없는 것이라 하여 십 이일에 유유의 판결을 내렸다.
다음에 남은 것은 형의 양정이었다. 죽일 것인가 목숨은 살리고 다른 벌을 줄 것인가. 조정에서는 사형론이 우세하여 아무도 감히 순신을 위하여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리해서 대세는 순신의 사형에 기울어질 뿐이었다.
이러하는 동안에 울산(蔚山)에서는 사명당 유정(유정) 과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과의 사이에 담판이 개시되었다가 파멸되어 전쟁이 다시 벌어진 것이 분명해 지매 사람들은 이 순신 같은 명장을 죽이는 것을 겁내게 더욱 왕의 생각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순신을 위하여 변명하거나 목숨을 빌어 주는 이가 없으니 왕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라야 어찌 되었던 내 사사 감정만 만족하면 고만이라는. 또 세력 잡은 웃 사람과 자기가 속한 당파의 다수 군중의 비위만 맞추어 벼슬 올라 가기로만 일을 삼는 사간원(司諫院)이니. 사헌부(司憲府)니. 심지어 학문으로 업을 삼아 일세의 풍교를 제 손에 쥐었다는 홍문과(弘文館)이니 하는 데 있는 주책없는 젊은 관리들이 들고 순신을 죽이라는 상소로 일을 삼으니 순신의 목숨은 실로 풍전 등화와 같았다.
이때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이 일어나.
『( ......) (순신은 명작이니 죽이는 것은 옳지 아니하나이다. 군사상의 이해 관계는 멀리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니 순신이 나아가지 아니한 것이 반드시 뜻이 없음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온즉 청컨댄 널리 용서하시와 훗날 공을 세우게 하소서.)』
하는 것이었다.
정탁(鄭琢)은 전 대신이요. 국가의 원로라. 그의 말에 대하여서는 감히 정면으로 다투는 이도 없었다. 이에 왕은 순신의 순을 특사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하였다.
사월 초하루에 순신은 사를 입어 출옥하였다. 이날부터 순신이 원수진에 가는 동안을 그의 친필로 쓴 일기를 보자. 그는 오래 못하였던 일기를 출옥하는 날부터 시작하였다. 일기는 물론 한문이다. 『 ...
......
...
......
...』
이것이 첫날 일기다. 번역하면.
「사월 초하루. 신유. 맑다. 원문을 나와 남대문 밖 윤 생간의 집에 가니 봉.
분두 조카와 아들 울이 있고 사행과 원경도 같이 앉았다. 함께 오래 이야기할 새 윤지사 자신이 와서 위문하고 비변랑이 순지도 찾아 왔다. 윤지사는 저녁때에 돌아가더니 술을 차고 다시 오고. 기헌도 왔다. 이순신(방답 첨사이던)도 술을 차고 와서 함께 취하여 정회를 풀었다. 파부사 정탁과 심판서 회수와 김 이상명원과 이 참판 정형과 노 대헌 직과 최동 지원과 곽동지 영도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