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벽파정에서 적의 대함대를 쳐물린 순신은 하대를 끌고 칠산 바다까지 순회한 뒤에 시월 초구일에 다시 우수영으로 내려 왔다.
적은 벽파정에서 패하여 달아나다가 이 순신의 함대가 추격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해남에 머물렀다(海南) . 그들은 조만간 순신의 함대가 추격해 올 것을 기다리고 분을 머금고 있었다. 이대로 참패하여 돌아갈 면목은 없었던 것이었다.
만일 순신이 열 두 척의 작은 함대를 가지고 넓은 바다에만 나오는 날이면 아직 삼백척이나 남은대함대를 가지고 한번 싸워 보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 순신의 함대는 따라 오지 아니 하오 보름이 지내어도순신의 함대는 빛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배에 실은 군량은 다 먹어 버리고 또 무인지경이나 다름 없는 해남에서는 군량을 더 얻을 길도 없었다. 그뿐 아니 하.
장졸들은 싸울 뜻을 잃었고. 벽파전의 보고를 들은 순천(순천)의 소서행장(小西行長)은 다시 수로로 서울을 향할 생각을 끊어서 구원을 보내지 아니하였다.
순신은 해남에 정탐 선을 보내어 적이 혼란한 상태에 있다는 보고를 듣고 곧 민선 삼백여 척에 무장을 시켜서 해남을 총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싸울 뜻이 있는 군사 한명은 싸울 뜻이 없는 군사 백명을 당한다.」하는 것을 순신은 이용한 것이었다. 벽파정 싸움이 지난지 이십여 일이 지났으니 적병은 반드시 분하고 긴장한 마음이 풀리고 지루하여 싸울 뜻이 없어졌으리라고 간파한 것이었다.
그뿐더러 순신이 당당한. 승전한 함대를 끌고 전라도의 서해안을 순시하는 동안에 승전을 축하하는 백성들에게 군량과 의복을 넉넉히 얻고. 또 각진에 있던 군기도 많이 얻었다. 게다가 순신의 부하 장졸들은 간 곳마다 백성들의 눈물겨운 환영을 받아 더욱더욱 용기를 얻었다. 또 의 용병으로 순신을 따르려는 장정도 오백여 명을 더 얻었다.
이 사람과 군기와 군량으로 피난민선 삼백척을 무장하여 비록 순련은 부족하나마. 당당한 대함대를 이룬 것이었다.
순신은 당당한 삼백척의 대함대를 끌고 우수영을지나 벽파진을 지나 해남을 향하였다 그것이 시월 십일 사경이다.
이튿날인 십 일일에 함대가 어란진 앞바다에 다다랐을때에 결사대 정탐군 이 순(李順). 박 담동(朴淡同). 박수환(朴守煥). 태 태귀생(太貴生) 네 사람을 보내어 해남 적정을 살피게 하였다.
오정이나 되어 정탐군이 돌아 와.
『해남에는 연기가 창천하였소 적선이 흩어져 남쪽으로 향하여 달아나오.』
하고 보고하였다.
『오. 그놈들이 달아나는 구나!』
하고 순신은 마족한 듯이 웃었다.
순신은 함대를 발음도 (發音島)에 닿이고 상상봉에 올랐다. 이날 바람이 없고 날이 맑아서 따뜻하기가 봄날과 같았다.
순신은 상상봉에서 적선의 숨은 곳을 찾아 보았다. 동에는 앞섬이 가로 놓여서 멀리 바라 볼 수가 없다. 북으로는 나주(羅州)를 향하여 영암 월출산(靈岩月出山)이 파랗게 바라 보이고. 서쪽으로는 비금도(飛衾島)로 향하여 안계가 툭 터졌다.
중군장우치적(禹致績)이오고 조효남(趙孝南). 안위(安위). 우수(禹壽)도 왔다.
조계종(趙繼宗)이 와서 해남의 적정을 아뢰고 적이 순신의 주사를 싫어한다는 말을 고하였다.
17
이튿날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장흥 부사(長興府使)등이 와서 순시에게 보이고 승전을 축하하였다. 이튿날인 십삼일에 배 조방장(裵助防將)과 경상 우후(慶尙虞侯)가 오고 또 임영준(任英俊)이 정탐임무를 마치고 돌아 와서 이러한 보고를 하였다.
『해남에 있던 적병을 초칠일에 우리 주사가 내려 오는 jrt을 보고는 겁을 내어 십 일일에 다달아나 버렸다 하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탐으로 순신의 신임을 받는 임영준은 놀랄 만한 보고를 또 하였다.
『해남아 전송 언봉(宋彦逢)이란 놈과 신용(慎容)이란 놈이 적의 진중에 들어 가서 적의 앞잡이가 되어 사인을 많이 죽였다. 하오.』
하는 것이었다.
순신은 임영준의 보고를 듣고. 곧 순천 부사(順天府使) 우치적(禹致績). 금갑만 호(金甲萬戶). 당포 만호(唐布 萬戶)안 이명(安以命). 소라 만호(召羅萬戶) 정 공청(鄭共靑). 군관(軍官) 임계형(林季亨). 정상명(定翔溟). 태 귀생(太貴生). 박수환(朴壽煥) 등과 일대의 군사를 해남으로 보내어 해남의 치안을 유지하고 잔적을 소탕할 것을 명하였다.
시월 십 사일에 순신은 군사 일을 생각하다가 삼경이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잠이 들락말락한 때에 순신은 한 꿈을 얻었다. 그것을 순신의 난중 일기에 있는 대로 적어 보자.
『 』
번역하면.
십 사일 신미 맑다 사경 「 .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위를 가다가 실족하여 개천에 떨어졌으나 넘어 지지는 아니하였는데. 끝에 아들 면이 나를 붙들어 안으려는 모양 같았다. 깨어 보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저녁에 천안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하였다. 떼어 보기전에 벌서 골육이 먼저 동하여 심기가 황란하다. 겨우 겉봉을 떼어 보니 열의 편지인데 외면에 「 통곡」이란 글자를 쓴 것을 보고 면이 싸워 죽은 줄 알고 낙담하여 실성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죽은 줄 알고 낙담하여 실성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같이 어질지 아니 하신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떳떳하거든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변이 어디 있을까. 천지가 캄캄하여지고 백일이 빛을 잃는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두고 어디로 돌아 가는 고. 영기가 뛰어났더니 하늘이 세상에 두시지 아니하심인가. 내가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침이냐. 내가 이게 세상에 있은 들 장차 누에게 의지하랴. 통곡할 따름이로다. 한밤을 지내기가 일년과 같구나!」 순신의 셋째 아들 면이 죽은 것은 이러한 일로였었다.
벼파진에 마다시의 함대가 참패를 당하고 대장 마다시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가등청정(加藤淸正)은 부하에게 명하여 충청도 아산에 있는 순신의 가족을 사로잡아 오기를 명하였다.
하루는 일본 군사가 뱀 발을 향하고 온다는 말을 듣고 집에 남아 있던 가족들은 모두 도망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때에 열 일곱 살 되던 면은 「적병이 오거든 나가 싸워 한 놈이라도 제 키에 어울리지도 아니하는 긴 칼을 차고 활을 메고 전통을 지고 말을 타고 적병 온다는 곳으로 맞아 나갔다.
18
면은 단기로 집 동쪽 고개를 넘어 동으로 말을 달렸다. 오리쯤이나 가서 약 오십 명의 말 탄 적병을 만났다. 면은 말을 세우고 적진중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
이곳은 벌판이라 몸을 숨길 곳은 없었다.
면의 화살은 경각간에 적병이 삼인을 쏘아 떨어뜨렸다. 불의에 이 변을 당한 적병들은 적이 한 어린 소년인 것을 보고 말을 급히 몰아 면을 에워싸려 하였다 면은 까딱 없이. 서서 활을 쏘았다. 적병의 조총 탄환이면의 말이 거꾸러지매. 면은 땅바닥에 서서 활을 쏘았다.
면은 화살이 다하매 칼을 빼어 들고 달려드는 적을 저항하였다. 적병은 면을 꼭 에워 싸고 군사를 시켜.
『네가 누구냐?』
하고 면에게 물었다. 화살을 다 써 버린 면은 오직 칼을 들고 적의 공격을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이 면이다.』
하고 면은 대답하였다.
『너는 이순신의 아들이냐?』
『그렇다. 나를 살려 놓고는 한걸음도 너희가 이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하고 면은 눈을 부릅떴다.
『내가 너의 가족을 죽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장이 보호하라기에 오는 것이다. 만일 더 저항하면 너도 죽여버리고 네 가족도 죽이려니와. 네가 항복만 하면 너도 살리고 네 가족도 해치지 아니하고 데려다가 편안히 살게 할 것이다.』
하고 그중에 대장인 듯한 사람이 말하였다. 면은 아버지가 웃던 모양을 본받아서 껄껄 웃으며.
『이순신의 아들이 너에게 항복할 듯싶으냐? 이 순신의 가족이 너의 칼에 죽을지언정. 젖먹는 어린 아이기로 항복할 듯싶으냐? 잔말 말고 이리 나와서 내 칼을 받아라.』
하고 칼을 들어 칼끝을 대장에게 겨누었다.
곁에 있던 적병들이 악! 하고 면에게로 달려들려 하였다. 그러나 대장은 소리를 질러 그것을 막았다.
『오냐. 네 뜻이 장하다. 그러면 나하고 싸워 볼까.』
하고 대장이 말에서 내려 면의 앞으로 나왔다. 대장은 나이 사십이나 되었을까. 웃우염이 여덟팔자로 나고 얼굴이 희고 눈에 영채가 있고 키는 중키나 될.날랠 듯한 사람이었다. 그는 면의 앞에 서서.
『네가 갑옷 투구를 아니 입었으니. 나도 갑옷과 투구를 벗을 테다.』
하고 칼을 곁에 있는 군사에게 맡기고 갑옷과 투구를 벗었다. 면은 적이 갑옷과 투구를 벗는 동안에 가만히 가다리고 있었다. 적장은 갑옷과 투구를 벗어 놓고 칼을 들고 며을 향하여 섰다. 면은 한번 칼자루를 다시 잡고 저장을 향하였다.
『요 읍!』
하고 적장은 칼로 바로 면의 면을 엄습하였다. 그는 면을 어리게 본 것이었다 면은 적의 칼을 피하면서 적의 왼편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적의 왼편 옆구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러나 중산은 아니었다.
적은 면의 칼 쓰는 법이 심상치 아니한 것을 보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두 사람은 어울려져 싸웠다. 칼과 칼의 마주칠 때에는 불꽃이 일었다. 두 칼이 번뜩일 때에는 햇빛이 비치어 무지개가 뻗쳤다.
면은 공세를 버리고 수세를 취하여 적이 칼 쓰는 법을 보고 그 허를 찌를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어린 적에게 먼저 옆구리를 찔린 적은 얼마큼 상기하여 연해 공세를 취하였다.
『이번 칼에는. 이번 칼에는!』
하고 적은 초초하나 면의 작은 몸은 용하게도 적의 칼끜을 피하였다. 만일 싸움이 오래끈다 하면. 면은 기운이 지쳐서 도저히 적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침내 면은 적의 검술의 허실을 다 보았다. 적은 부하 군졸에 대한 면목으로라도 면을 이마로부터 두 쪽에 칼라 버릴 야심을 가진 것이었다.
19
적의 허실을 다 짐작한 면은 한걸음 바싹바싹 다가 들어 공세를 취하였다.
면의 칼끝이자주 적의 몸과 옆구리와 가슴을 범하였다 지금까지의 힘이 부친 듯하던 면은 새 기운을 얻은 듯이 몸이 가벼워지고 칼날 돌아 가는 것이 더욱 빨라졌다.
이것을 본 적은 초조한 생각을 넘어서 일종의 무서운 생각을 가진 듯하였다.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다. 그러나면은 가끔 한 손으로 안으로 넘어 오려는 초립을 뒤로 잦혀 바로 잡을 여유를 보였다.
이러기를 거의 일각이나 한 때에 면은 힘없이 칼을 옆으로 비끼는 듯하였다.
이 틈을 타서 칼로 바로 면의 이마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면의 몸은 두 쪽으로 갈라지라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면의 일종의 전술이었다. 적이 연해 자기의 이마를 겨누는 눈치를 보고 정면에 허한 빛을 보여 적의 칼을 유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적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면의 정면을 내려 칠 때에. 면은 나는 듯이 적의 왼편 옆으로 몸을 돌려 칼끝을 깊이 적의 왼편 가슴에 찔렀다. 피는 면의 칼로 흘러내렸다. 면이 칼을 빼어다시 적의 목을 치려 할 때에 적은 칼에 쓰러지고 뒤로서 다른 적이 내달아 면의 칼 든 팔을 찍었다.
면은 곧 왼손으로 땅에 떨어진 칼을 집었으나. 다른 칼이 또 면의 왼편 팔을 찍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오는 칼이 또 면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면에게 가슴을 찔려 넘어졌던 적은 이윽고 눈을 뜨더니.
『그. 고놈을 죽이지 말아라.』
하고 외쳤다.
『벌써 죽였소!』
하고 면의 목을 쳐 떨어뜨린 사람이 말하였다.
『아깝다!』
하고 적은 눈을 감았다가.
『조선에 아직도 사람이 있다. 순신의 집은 습격하지 말고 돌아 가거라.』
하고 적도 죽었다.
적은 죽은 대장과 동료의 시체를 말에 싣고 오던 길로 돌아갔다. 면이 죽은 것은 이리하여서였다. 이때에 면의 목을 잘라 떨어뜨린 적은 후에 수군이 되어 싸우다가 순신에게 잡혀서 죽었다.
순신은 곧 전라. 경상 양도의 바다를 손에 넣으려 하였으나 날은 점점 추워 가고 군량은 없고 군사도 부족할 뿐더러. 병선. 군기도 부족하여 경성히 단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순신은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강진 현감(康津縣監)등으로 하여금 군량을 실어 오라 명하고. 또 일변목포(木浦)항에 있는 보화도(보화도)에 병영을 건축하여 만일의 경우에 근거지를 삼기를 준비하고 또 김종려(김종려)로 염장 감자 도감(鹽場監煮都監)을 삼아 바람섬 등 열세 섬에 소금을 굽게 하였다.
각처에 숨었던 장졸들도 하나씩 둘씩 순신에게로 돌아 왔다. 순신은 돌아온 자는 죄를 사하여 다시 썼으나 그렇지 아니한 관리들. 예하면. 경상 수사 배 설 같은 자는 죄을 적어 장제하였다.
시월 이십 사일에 당 나라 주사가 강화도(江華島)에 왔다는 기별이 순신에게 왔다.
당 나라 주사는 수군 도독(水軍都督) 진인(陳璘)이 거느린 칠천명수군과 백여 척 전선이었다.
그 이튿날인 이십 오일에 선전관(宣傳官) 박희무(朴希茂)가 교지를 받들고 내려 왔다. 그것은 명나라 수군이 정박할 만한 근거지를 알아 올리라는 것이었다.
순신은 고금도(古今島)가 합당한 뜻으로 대답하고. 자기는 보화도에 병영과 창고 건축을 독려하였다. 대개 순신은 조선군과 명균이 도저히 같이 하기 어려울 것과. 또 명균이 싸움에 방해는 될지언정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을 잘 안 까닭이었다.
순신은 날마다 몸소 사오백명 역군을 독려하여 병영창고. 오로 . 선창 등의 공사를 하였다.
20
벽파진 싸움에 이 순신이 승전한 영향은 어찌 되었나. 둘째 번명 나라 청병도 팔월 십 오일 남원(南原)의 패전에 기세가 꺾이어 서울을 버리고 물러가 압록강(鴨綠江)을 지키자는 말까지 났었다. 명균의 생각에는 일본군을 저항할 수 없다고 믿었다.
원래 명균은 일본군을 무서워함이 여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유년에 둘째 번 청병되어서 조선에 온 경리사(經裡使) 형 개(邢价)는 심유경(沈惟敬)을 시켜 외교적으로 일본군을 물리치려 하였다. 그러나 심유경은 벌써 일본이나 명 날 조정에나 신용을 잃은 사람이었다.
그는 풍신수길이 봉을 받고 명나라를 섬기는 충성을 가졌다고 명나라 황제를 속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풍신수길의 군사가 다시 조선에 건너 왔다는 보고가 북경 조정에 이르매. 양 방형(楊方亨). 심유경(沈惟敬)등 책봉사로 갔던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을 믿고 추천하였던 병부 상서 석성(石星)까지도 죄를 입게 된 것이었다 이러하므로 형 개의 명을 받은 심유경은 몸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진에 들어가기가 무서워서 조선 유정(사명당)으로 하여금 「형 총독이 대병 칠십만을 거느리고 오니 곧 퇴병함이 일본에 이하리라. 나는 싸우이 일기를 원치 아니하는 생각으로 이 말을 미리 보내는 것이니. 후회가 없이 하라」하는 밀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때 청정은 서생포(西生浦)에 유진하고 있었다. 그는 심유경에게 이렇게 회답을 썼다.
『 』
번역하면.
「태사(심유경을 가리킴)의 말에 대명병이 쓸어 나온다 하니 이는 소원이라.
조선병은 도무지 적수가 되지 아니하니 대명병과 쾌히 한번 싸웟 조선국은 말할 것도 없고 대명나라 북경까지 불살라 버릴 터이니. 머리를 들리지 말지어다.
이런 좋은 일이 또 있는가.」 이러한 편지를 받은 심유경은 말할 것도 없고 명병도 간담이 서늘하였다.
사실 가등청정은 겨울이 되기 전에 압록강을 넘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벽파진에서 마다시의 대함대가 참패를 당하매. 일본군은 전진할 기운을 잃어 버렸다.
왜 그런고 하면. 조선은 팔년풍전에 백성이 농사를 짓지 못하여 육지에는 양식이 넉넉지 못한 데다가 조정에서는 체찰사 이 원익(李元翼)의 계교에 따라 경상. 충청. 경기 제도에 청야법을 행하였다. 장정과 부녀와 양식과 재물을 모두 산서으로 옮기고 평지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군이 경성과 압록강을 향하자면 군량. 군기를 바다로 운반하지 아니하고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군이 조선 바다의 재해권을 가지는 것은 군사 행동을 위하여서는 절대로 필요한일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이 순신이 벽파진 싸움에 져서 일본 함대에게 경강으로 통하는 길을 주었다면. 그 싸움이 있는 지 열흘이 넘지 못하여서 서울이 함락되었을 것이요. 다시 한 달이 넘지 못하여서 가등청정의 계획대로 압록강에 다다랐을 것이었다.
이렇게 되매 일본군은 겨울이 가깝다는 것을 핑계로 전진 계획을 버리고 순천(順天). 사천(泗川). 김해(金海). 부산(釜山). 기장(機張). 울산(蔚山) 등 해안 요지에 혹은 성을 쌓고. 혹은 집을 짓고. 혹은 밭을 갈아 반영구적 준둔 계획을 세우고. 다시 때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군의 전진 기세가 돈좌되는 것을 보고 조선의 조정과 명균도 기운을 얻어 한 번 싸워 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