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 14 (06~10)

6

그러나 이때에 벌써 명 나라 대군은 숙천(肅川)에 다다랐다. 해가 저물어 대군이 바야흐로 밤을 짓고 숙소를 정하려 할 때에 순안에서 평 호관을 죽이고 그가 거느린 병정 세 사람이 평양으로 도망하였다는 보고가 왔다. 이보고를 들으매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일각을 주저 할 수 없다 하여 활을 당기어 줄을 올리었다 이것은 진군하라는 . 뜻이다. 그리고 이여송은 말에 올라 종자 수기를 데리고 순안(順安)으로 달려 가고막하 제영에도 뒤를 이어 숙천을 떠나 밤새도록 행군하여 이튿날 이른 아침에 평양성을 에워싸고 보통문과 칠성문을 쳤다. 이것이 계사년 정월 초육일이었다.
삼 일간격전이 있는 후에 초팔일에 마침내 소서행 장군은 평양성을 버리고 얼음 위로 대동강을 건너 달아났다. 사흘 동안 싸움에 평양성 내외에는 시체가 없는 곳이 없고 군사들의 발에 밟힌 눈 위에는 세 나라 군사의 붉은 피로 수를 놓았다. 화전과 대포에 평양 성중의 민가는 반 넘어 타버리고 칠성문도 대포를 맞아 무너졌다.
류성룡은 미리 황해도 방어사(黃海道防禦使)이 시언(李時言). 김경로(金敬老)에게 밀령하여 평양에서 패하여 달아나는 적병을 전멸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언과 경로는 싸우기를 두려워 피하고 황해도 순찰사(黃海道巡察使) 유영경(柳永慶)도 해주에 있어서 동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자기가동하지 아니할 뿐더러 도리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방어사 김경로를 해주로 불러 들였다.
이리하여 평양성을 떠난 소서행장. 평 의지(平義智)현소(玄蘇). 평 조신(平調信) 등은 패잔병을 거느리고 아픈 다리를 끌며 서울로 향하였다. 그들은 촌려에 들어가 배를 가리키고 입을 가리켜 밥을 빌어 먹으나 조선 사람중에는 그들을 해하려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류 성룡의 명령을 받은 방어사 이 시언(李時言)이 멀찍이 일본군의 뒤를 따라 오면서 주리고 병들어 길가에 넘어진 군사 육십여 명의 목을 매었을 뿐이었다.
명군이 평양을 회복하였으나 차일 피일하고 진군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이번 평양성 싸움에 일본군의 무서움을 맛본 까닭이었다. 평양에 입성한 뒤에 명군이 조선군사와 인민에게 대한 폭행은 여간이 아니었다. 말이 통치 못하여 조름만 제 뜻대로 아니 되면 곧 칼등으로 조선 군사를 때리고. 조선 군사가 얻은 수급이나 노획품이나다 빼앗아서 제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실수한 것은 모두 조선군의 책임으로 돌렸다.
평양이 호복되매 왕은 종신을 데리고 평양으로 왔다. 왕은 제독 이 여송(이영송)을 만나 평양을 회복한 수고를 사례하고 속히 행군하여 서울을 회복하기를 청하였다.
『군량이 있어야 아니 가오.』
하고 이 여송은 책 말하는 듯한 눈으로 왕을 보았다. 왕은 어색하여 시신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이 처지에 오만 명 대군의 군량을 댈 생각을 내는 이는 없었다. 평양성의 군량은 일본군이 다 먹어 버리고 남은 것은 이번 싸움에 다 불타 버렸고 대동강 저편인 . 황해도에도 난리를 겪고난 나머지에 인적이 끊였으니 군량이 있을 리가 없었다.
왕은 하릴없이 류 성룡(柳成龍)에게 군량 판비할 것을 명하였다. 류 성룡은 왕명을 받아 곧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넜다.
성룡은 백설이 날리는 추운 밤에 종사관과 종자 수인을 데리고 밤중에 중화(中和)를 지나 새벽에 황주(黃州)에 다다랐다. 밤새도록 말을 달린 것이었다.
지나오는 길에는 촌락이 비고 닭. 개 짐승의 소리도 들을 수가 없으며 어디나 촌가에 불 하나 반짝거리는 데도 없었다.

7

류 성룡은 황주에 앉아 황해 감사 유영경(柳永慶)에게 이문하여 황해 연안의 곡식을 황주 기타 직로에 연한 각읍으로 실어내이기를 명하고. 평안 감사 이원익(李元翼)에게 명하여 김응서(金應瑞) 등의 군사 중에 싸움을 강당 못할 만한 자로 하여금 평양으로부터 곡식을 져나르게 하기를 명하고. 또 배를 대동달 하류에 삼현오읍(三縣五邑)으로 보내어 거기 쌓인 곡식을 싣게 하였다.
이리하여 류 성룡은 죽을 힘을 다하여 군량을 판비하였다.
이 여송(李如松)의 대군이 개성부(開成府)에 들어 간 것이 정월 이십오일.
대군이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은 실로 류성룡의 공이었다.
이때에 평양에서 패한 소서행장의 군사가 서울로 들어와 평양에서 명군에게 속은 말이 전하매 이것이 다 조선 사람의 괴계라 하여. 서울에서는 정월 이십 일에 조선인 대학살이 개시되었다. 이것은 또 경성 안에 있는 조선 사람이 명군과 내응할 것을 두려워하는 의심에서도 나온 것이었다. 이날에 서울에 있던 조선 사람은. 특히 일본군에 붙은 상류 계급을 내어 놓고는 하나 아니 남고다 살육을 다하였다고 한다. 또 촌락도 많이 불을 놓아 서울 장안이 하우 동안에 초토가 되고 무인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적군은 앉아서 서울을 지킬 것이냐 나아가 명군을 맞아 싸울 것이냐 하는 두 가지 의론이 있다가 마침내 서대문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입화 종무(立花宗茂)가 선봉이 되고. 죽전국주(粥前國主)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 주장이 되어 명군을 중로에 맞아 싸우기로 작정되었다.
개성부에 든 명군 중에는 또 여러 가지 의론이 생겼다. 사 대수(사대수)는 급격 물실론을 주장하여 곧 서울을 공격하기를 주장하고. 전 세정(錢世楨)은 궁구 물추론을 주장하여 서서히 적의 귀로를 끊기를 주장하였다.
이렇게 유예미결하는 동안에 임진강의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서울서 도망하여 온다는 사람 하나가 「서울 있던 일본군은 반이나 도망하였다.」하는 말을 전하였다.
이것은 아마 일본군에서 보낸 사람으로서 명군의 마음을 놓게 하는 수단인 듯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말 한마디는 마침내 이 여송의 결심을 재촉하는 힘이 있어서 이십 칠일에 이 여송은 몸소 선봉이 되어 대군을 몰고 개서을 떠났다.
임진가에서는 류 성룡이 명군이 지체하지 아니하게 하려고 각처에서는 류 성룡이명균이 지체하지 아니하게 하려고 각처에서 칡과 갈을 모아 굵은 도아줄 몇 오리를 꼬아 임진강을 건너 놓고. 동아줄 눈에 굵은 막대기를 가로 놓아 뜬 다리를 만들어 대군이 말을 타고 지나가게 하였다.
이여송의 대군이 파주(波州) 동파(東波)역에 다다른 것이 그날 석양이었다.
이튿날 조선 장수 고 언백(高彦伯)이 조선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고. 부총명사 대수(査大收)가 명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뒤를 따라 경성을 향하고 적군의 정세를 살피기로 하였다.
고언백. 사 대수의 군사가 벽제관(벽제관)을 지나 박석 고개(벽제관)에서 십오리. 서울에서 삼십리. 혜음 고개(혜음고개)에서 이십리 되는 곳에서 일본군 정찰대와 마주쳐 싸워 일본군 백여 명을 베었다.
이 보고를 듣고 이 여송은 일본군도 무섭지 않다는 생각을 얻어 이 여송이 땅에 떨어졌다. 따르던 장수들이 놀라 이 여송을 붙들어 일으키고 이것이 무슨 흉조나 아닌가 하여 겁을 내었다.

8

그러나 이 여송은 곧 일어나 흙 묻은 갑옷을 벗어 던지고 다시 말에 올라 앞서 달렸다.
이윽고 박석 고개가 바라보이는 곳이 이르매 고개 위에 일본병 수백 명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명병이 오는 것을 보는 일본병은 마치 달아나는 듯이 박석 고개에서 스러지고 말았다.
이 여송은 말에서 떨어진 것이 심히 불쾌하였다. 그 불쾌한 생각이 여송의 용기를 병적으로 돋구어 적의 형세를 염탐해 보지도 아니하고 군사를 좌우익으로 나누어 박석고개로 올려 몰았다.
여송의 천여 기가 거의 박석고개 마루터기에 당도하였을 때에 고개 너머로부터 만여 명 일본군이 긴 칼을 번뜩이며 고함을 치고 돌진하였다 불의에 대군을 마난 명병은 무서운 생각이 났으나 칼과 칼이 맞부딪칠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여송의 군사는 북병(북방군사)이 되어서 총기가 없고 가진 것이 오직 단검 뿐이었고 그 단검이란 것도 날이 무디어 도무지 힘이 없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가진 칼은 길이가 삼사척이나 되고 날이 예리하여 한점 두르면 족히 삼사인의 허리를 벨 수가 있었다.
이렇게 잛고 무딘 칼을 든 명병은 날카롭고 긴 칼을 든 일본병의 손에 마치 풀잎사귀와 같이 스러졌다.
이 여송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음을 보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죽다 남은 명병도 대오를 잃고 칼을 버리고 장을 거꾸로 끌고 달아났다.
파주에 패해 돌아온 이 여송은 패했단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아니하고 심히 풀이 죽었다. 밤에는 밥도 잘 먹지 아니하고 오늘 박석 고개 싸움에 죽은 장정과 사랑하던 자를 위하여 통곡하였다.
이튿날이여송은 동파(東波)로 퇴군한다고 주장하였다. 여태껏 이 여송의 감정을 상할까 하여 잠잠코 있던 류성룡은 우의정 유홍(兪泓)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과 순변사 이 빈(이빈) 등을 데리고 여송을 찾았다.
이때에 여송의 장외에 나서고 제장이 좌우에 서서 퇴군하라는 영을 듣고 있었다. 류 성룡은 이 여송의 앞에 나아가.
『승부는 병가상사라. 다시 형세를 보아서 싸우는 것이 옳거든. 어찌 가벼이 동하려 하시오?』
하고 퇴군에 반대하는 뜻을 표하였다. 여송은 성룡의 말이 어제 박석 고개 싸움에 진 것을 의미하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성을 내며.
『지기는 누가 졌어? 어제도 우리 군사가 적병을 많이 죽여서 싸움에 이기지 아니하였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더구나 퇴군할 까닭이 없지 아니하오! 이제 퇴군하면 적이 만심을 내어 천명(명나라 군사를 하늘 구사라고 존칭하는 뜻)을 능멸하지 아니하오!』
하고 성룡은 다투었다.
『져서 퇴군하는 것이 아니야. 누가 졌다고 해? 이곳이 비가 와서 땅이 질어서 대군을 머물기에 합당치 아니하니까. 동파에 돌아가서 잠깐 군사를 쉬어서 다시 싸운다는 말이야!』
하였다. 그러나 이 여송은 속이 굴한 것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뽐내어도 말에 속심이 없었다.
류성룡은 등은 여러 말로 퇴군이 불가함을 역설하였으나 명장 측에서는 여송에게 퇴군하지 아니치 못할 것을 반박하였다.

9

류 성룡 등이 굳이 퇴군이 불가함을 주장하매. 여송은 귀찮은 듯이 명 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주본초를 내어 성룡에게 보였다. 성룡이 보니. 그 속에는「( ) (서울에 있는 일본군이 이십여 만이니 중과 부적이로소이다)」하는 구절도 있고 끝에는.「 ...(신이 병이 대단하오니 다른 사람으로 갈아 주시옵소서)」하는 구절도 있었다. 이것은 다 말짱한 거짓말이었다.
류성룡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 손가락으로 「적병이십 만」이라는 구절을 가리킨며.
『적병이 이십만이라니. 웬 이십만이요? 이만도 못 되거든 무슨 이십만이요?』
하였다. 여송은 더욱 귀찮은 듯이.
『이십만인지 이만인지 내가 알 수 있어? 너희 나라 사람들이 이십만이라 하니까 그러지.』
하고 발을 굴렀다. 곁에 섰던 명장 장세작(張世爵)이.
『이놈들의 말을 들을 것 있소? 어서 퇴병하셔야 하오.』
하고 여송에게 진언하고 류 성룡 등을 노려 보았다.순변사 이 빈(李빈)이 크게 분개하여.
『퇴병이라니 안될 말이요. 그래 황상이 노야에게 대군을 맡겨 보내실 때에 한번 싸워 보고 지면 퇴병하라고 하셨소?』
하고 들이 세웠다.
이 말에 장세작은 발을 들어순변사이 빈의 등을 냅다 차서 이빈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놈들. 다 나가! 그렇게 퇴군하기 싫어하는 놈들이 왜 부산서 의주까지 한번 싸움도 변변히 못하고 달아나?』
하고 호령하였다.
류성룡.유흥. 김명원. 이 빈 등 조선의 대관들은 목구멍까지 북받쳐 오르는 분을 참고 못나게도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 나왔다.
여송은 삼영 군사를 끌고 그날로 임진강을 건너 동파로 오고. 이튿날 또 동파를 떠나 개성으로 돌아 오려 하였다. 류 성룡은 또 죽기를 무릅쓰고 여송에게 퇴군의 불가함을 말하였다. 여송은 성룡에게 퇴군 아니 하기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성룡이 여송의 진문 밖에 나선 지 얼마 아니하여 여송은 말을 타고 개성으로 향하고 그의 부하 제장고 군졸들도 총퇴각을 하였다. 오직 부총병 사 대수와. 유격 모 승선(母承宣)이 수백 군졸을 데리고 임진을 지킬 뿐이었다.
여송의 군사가 개성에 들매 군율이 해이하여 장졸들은 마음대로 여염에 출몰하여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를 겁간하여 백성들은 다시 이사하기를 시작하였다.
게다가 군량은 진하여 강화(강화). 충청(충청). 전라(전라) 등지에서 ttlfdj 오는 곡식과 마초는 오기가 무섭게 다 먹어벼렸다. 군량이나 마초가 명 나라 군사가 먼저다 먹어 버리고 조선 군사들은 굶을 지경이었다.
류 성룡은 동파에 머물러서 매일 사람과 글을 보내어 이 여송에게 진병하기를 청하나 여송은 들은 체도 아니 하였다. 그리고 군량과 마초만 대라고 재촉하였다.
청병을 해온다는 것이 원수를 몰아 온 것을 조선 사람들은 후회하였다.
하루는 여송이 전군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물러가려 한다는 말을 동파에 있는 류 성룡에게 전하는 이가 있었다. 류 성룡은 최후로 한번 더 퇴병의 불가함을 말할 양으로 말을 타고 동파를 떠나 개성으로 향하였다.
길가의 산들은 패퇴하는 일본군의 손에 불을 놓여 촌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산이나 들에 나무 한 개. 풀 한 포기도 남은 것이 없었다. 성룡은 울었다

10

류성룡이 중로에 다다랐을 때에 개성 쪽으로서 난데 없는 명병 십여 명이 질풍같이 말을 몰라 오더니 류성룡 일행을 보고.
『유 체찰사가 누구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유 체찰사요.』
하는 성룡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명병 중에 두목인 듯한 자가 길이 넘는 혁편을 들어 류성룡이 탄 말을 때리는 듯 류 성룡의 어깨로부터 등을 후려 갈겼다. 그 소리가 딱하고 벼락같았다.
류성룡의 말을 이 불의의 변을 당하여 매 맞는 주인을 떨어뜨려 버리려고나 하는 듯이 네 굽을 안아 뛰었다.
류 성룡은 어깨와 등이 칼로 에이는 듯이 아픔을 까달았다. 그리고 그의 늙은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것으 매맞은 자리가 아파서 떨구는 눈물은 아니었다. 명 나라에게 멸시받는 내 나라 사람의 처지를 우는 가슴이 터지는 눈물이었다.
류 성룡이 가까스로 달리는 말을 진정하고 고개를 돌려 뒤따르는 명병에게 연유를 물으려 할 때에 둘째 혁편이 그의 면상을 향하고 떨어졌다. 그는 두 눈이 아뜩하여 하마터면 말고삐를 놓치고 기절하여 땅에 떨어질 뻔하였다.
성룡이 정신을 차려 다시 눈을 뜰 때에는 이마와 뺨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내리는 것이 보였다. 성룡은 소매를 들어 그 피를 씼었다.
명병들은 성룡의 등과 말을 수없이 때려 순식간개성에 당도 하였다.
명병들은 여송의 진문 밖에서 류 성룡을 말께서 끌어 내려 군노가 죄인을 잡아 들이듯이 성룡의 목덜미를 짚고 무릎으로 궁둥이를 차서 여송의 장하에 꿇렸다. 곁에는 벌써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 성중(李誠中)과 경기감사(경기감사) 이 정형(李廷馨)이 굴복하여 군량거행태만한 죄로 여송에게 힐책을 당하는 중이었다.
류성룡이 잡혀온 것을 보고 여송은 소리를 높여.
『네가 의정이 되어서 황군의 군량 거행을 등한히 하였으니. 네 죄가 죽여 마땅해. 군법 시행할 터이니 그리 알아라!』
하고 호령하였다. 류성룡은.
『잘못되었소. 그러나 태만한 것은 아니요. 멀지 아니하여 군량 실은 배가 들어 올 것이요.』
하고 빌었다. 그리고는 눈물고 콧물이 한테 쏟아져서 걷잡을 수가 없고 마침내는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다.
『나라 일이 이렇게 될 데가 있느냐!』
하고 류 성룡은 통곡하였다. 판서 이 성중과 경기 감사 이 정형도 참았던 분과 설움이 터져서 통곡하였다. (이러고도 이 무리들은 마침내 명 나라에 의지하는 사대심을 버리지 못하였다. ) 그러나 이 통곡은 목적하지 아니한 효과를 내었다. 이여송은 류 성룡의 통곡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나서. 이번에는 자기 부하 제장에게 대하여.
『너희들이 예전 나를 따라서하(서하)를 칠 때에는 전군이 여러 날을 굶어도 감히 돌아간다는 말을 내지 아니하고 마침내 대공을 이루었거든. 이제 조선에 와서는 양식 떨어진 지 며칠이 못되어 어찌 감히 돌아가자고 하느냐. 너희들이 가고 싶거든 가거라. 나는 적을 멸하지 아니 하고는 아니 돌아 갈 터이다. 나는 마땅히 말가죽으로 내 시체를 싸려 한다.』
하고 호령하였다. 명나라 장수들은 이 의외의 책망에 황공하여. 모두 여송의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류 성룡은 여송의 진에서 나와서 군량을 대지 못한 죄로 개성 경력(開城經歷) 심 예겸 을 (沈禮謙) 때렸다. 이윽고 강화로부터 군량 실은 배 수십척이 서강(西江)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