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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여송이 퇴군 아니 한다는 결심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에 명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총병 장 세작(張世爵)으로 하여금 류 성룡(柳成龍)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 지나간 일(류성룡을 혁편으로 때리고 군법 시행한다고 으른 것)을 잊으라고 위로하고 퇴병 아니 할 뜻을 확언하였다.
그러나 좋지 아니한 소식(이 여송에게는 좋은 소식)이 왔다. 그것은 함경으로부터 온 사람이 말하기를. 가등청정(加藤淸正)이 함흥(咸興)으로부터 양덕(陽德). 맹산(孟山)을 넘어 평양을 습격하려 한다고 한 것이다.
이말에서 이 여송은 평양으로 퇴병할 마침의 핑계를 얻었다. 그는 류 성룡을 불러 말하기를. 평양은 근본이니 만일 평양을 잃으면 대군이 돌아 갈 길을 잃을 것이니. 가 구원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류 성룡은 다섯 번이나 이 여송을 보고 그렇지 아니함을 말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여송은 부하 왕 필적(王必迪)을 머물러 개성을 지키게 하고. 대군을 끌고 평양을 향하여 떠났다. 떠날 때에 접반사(接拌使) 이덕형(李德馨)더러 말하기를. 대군이 가면 조선군은 세고 무원하니 조선군도 대군을 따라 대도동강 북쪽으로 피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덕형은 이말을 거절하였다. 이 여송의 군사는 평양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때에 조선군의 배치는 이러하였다 -.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은 고양 행주(高陽幸州)에 유진하고.
수변사이 빈(李빈)은 파주(坡州)에. 방어사 고 언백(高彦伯). 이 시언(李時言) 등은 게넘이 영에. 원수 김명원(金命元)은 임진강 남쪽에. 류 성룡(柳成龍)은 동파(東坡)에 있었다. 이 여송이 조선군까지도 끌고 가려 하는 것은 표면은 조선군의 고단한 것을 근심이라 하나. 그 실은 명병이 물러 간 뒤에 혹시나 조선군이 일본군을 싸워 이기지나 아니할까 두려워함이었다.
벽제관(벽제관) 한번 싸움에 명 나라 오만 대군을 깨뜨린 일본군은 평양에서 잃었던 기운을 회복하여 다시 임진강을 건너 개성을 무찌르려 하였다. 일본군은 아직명병이 평양으로 퇴거한 줄은 몰랐다. 설마 벽제관 한 싸움에 그렇게 만만하게 퇴거하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한 것이었다.
일본군의 생각에는 명나라의 대군과 결전하려면. 먼저 경기도 각지에 있는 조선구늘 소탕하는 것이 필요치다하였다. 그중에도 행주의 권율(權慄)의 군사는 수원 도성 산성(水原禿城山城)에 웅거하였을 때 일본군이 싸워서 이기지 못한 강적이기 때문에 이 군사를 행주에 남겨 두고는 임진가 이북에 군사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월 십 이일 조조에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선봉이 되어 전군을 칠 때에 나누어 행주성을 쳐들어 왔다. 이때에 행주 산성에는 권율이 전라도 군사 칠천과 중 처영(처영)이 거느린 승병 일천과 행주 민병 천여 명을 산성에 모아 가지고 있었다. 산 밑으로는 여러 겹으로 목창을 두르고 또 땅을 파서 군사를 감추었다.
행주 산성은 남은 한강에 임한 절벽이요. 동과 북은 평양에 임하였으나 역시 절벽이요. 오직 서쪽으로 사람이 통할 골짜기를 이루었다. 산은 크지 아니하나 골짜기가 많아 만 명이나 되는 군사를 감추어도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할 만하였다.
십 이일 아침에 척후병이 일본군이 행주를 향하고 온다는 것을 보하매 권율은 군사들에게 세 번 먹을 밥을 싸주게 하고 몸소 군사들이 쉬는 곳으로 순회하면서.
『오늘은 적병을 다 죽이거나 우리가 죽거나 할 날이다. 이 세 덩어리 밥을 다 먹고도 적병을 멸하지 못하면. 다시는 밥을 먹지 아니할 것이다.』
하고 격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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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은 승장 처영(處英)으로 하여금 승병 이천을 거느리고 산성 서쪽을 지키게 하고. 기타 부하 장졸로 하여금 각기 부서를 따라 지키게 하고. 행주의 부인. 처녀 아동들로 하여금 혹은 돌을 나르고 혹은 군사에게 물을 나르고 혹은 물을 끓이게 하였다.
이윽고 적군의 선봉 백여 기가 나타나고 그 뒤에 대군이 좌우익으로 나뉘어 밀어 오는 것이 보였다. 산성에 올라 망보던 군사의 말이 오리 밖에 적군이 수없이 달려 오는 것이 보인다고 하였다.
적군은 붉은 기와 흰 기를 수없이 날리고 또 군사들마다 등에 붉은 기와 흰 기를 꽂고. 장수인 듯한 자는 황금산을 받고 얼굴에는 귀면을 쓰고 어떤 장수는 짐승의 탈을 쓰고. 별별 긱 괴괴한 모양을 한 장졸이 악악 소리를 치며 달려와서 경각에 행주 산성을 삼면을 에워쌌다.
권율은 군사에게 영을 내리어 적군이 책 밑에 가까이올 때까지는 꼼짝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행주 근방에서 모인 민병들은 이 기괴한 대군이 오는 것을 보고 겁을 내어 달아나려 하였으나. 삼면으로 적군이 에워 싸고 일면은 대 강인 것을 볼 때에 그들은 달아날 수 없을 줄을 알고 죽기로써 싸우기를 맹세하였다.
적군은 삼면으로 점점 산성 밑으로 바싹바싹 대들었다. 권율은 그제야 칼을 빼어 들고 몸소 군사들을 호령하여 싸우기를 명하였다. 목책과 구덩이 소게 숨은 전라도 정병들의 살이 푸르륵 소리를 내며 일제히 날으기 시작하였다. 이편은 높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쏘는 것이요. 저편은 낮은 벌판에서 몸을 드러내어 놓고 싸우는 터이라. 이편의 살은 백발백중으로 저편 군사를 맞히지마는 저편에서 쏘는 살과 총알은 목책과 떨어질 뿐이었다.
적의 제일군은 순식간에 거의 전멸이 되고. 이윽고 제이군이 대어 들었다.
이편에서는 활을 쏘고 총을 놓고. 돌을 굴리고 모래를 뿌리고. 저편 역시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다.
이러하는 동안에 적의 제이. 제삼. 제사. 제오. 제육. 제칠. 제팔의 군이 삼슬 듯하여 넘어지니 해는 벌써 석양이 되고 산성. 앞 벌판에는 피가 냇물같이 흐르고 주검이 더미더미로 쌓였다. 이편 군사도 반이나 죽었다. 군사들은 피곤하고 살도 다하였다. 돌을 나르는 부녀들의 치맛자락도 다 떨어졌다.
아이들의 손과 발에서는 피가 흘렀다. 마침 충청도 수군 절도사정 걸(정걸)이 살과 군량을 싣고 행주 산성 밑에 들어 와 닿았다. 이것은 피곤한 군사들에게 백배의 용기를 주었다.
그중에도 가장 참혹하게 싸운 것은 산성 서쪽을 지키는 승병이었다. 적군은 산성을 치려면 서쪽을 깨뜨릴 수밖에 없음을 알고 처영이 승병을 거느리고 지키는 서쪽을 향하여 아홉 번이나 돌격을 하였다. 그러나 처영과 부하인 승병들은 오직 한번 뒤로 물러갔을 뿐이요. 끝끝내 버티었다. 그들은 천명 중에 구백여 명을 잃어도 물러가지 아니하여 마침내 적으로 하여금 단념하지 아니치 못하게 하였다.
적은 최후의 돌격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시석을 무릅쓰고 홰를 가지고 돌격하여 산성 목책에 불을 놓을 계획을 썼다. 이편에서는. 물을 가지고 적병이 놓은 불을 껐다. 해는 거의 넘어 가서 한강의 굽이치는 물에는 낙조가 피밫과 같이 비추었다.
불로 치려던 계획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일본군은 수없는 시체를 버리고 총퇴각을 개시하였다.
권율은 퇵각하는 적군을 추격하는 모양만 보이고는 적군이 황혼 소겡 아니 보이게 된 때에 쇠를 울려 싸움을 거두고 적장의 머리 일백 십 개와 왼편 귀 두 개를 베고 나머지 시체는 여러 더미로 모아 쌓고 불을 사라라 버렸다. 이 싸움에 군기를 얻은 것이 칠백 이십 칠건 이었다.
13
행주(행주)의 대승전은 조선인에게 또 한번 새 용기를 주었다. 방어사 고 언백(高焉伯). 이 시언(李時言). 조방장 정희현(鄭希玄). 박 명현(朴名賢) 등은 유병이 되어 계념이 영을 막고 의방장 박 유인(朴惟仁). 윤 선정(尹先正). 이 산휘(李山輝) 등은 창릉(昌陵). 경릉.(敬陵) 간에 숨어 적진을 엄습하여 적이 많이 나오면 피하고 적게 나오면 잡아 이 모양으로 적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다.
그뿐러더 이 때문에 적병이 촌려로 다니며 구량. 계견. 마초를 구하지 못하여 크기 곤란하였다.
이 여송(李如松)은 명군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하는 길에 평산(平山) 땅에서 권율(권율)의 행주 대첩의 보를 듣고 부끄러워 평양으로 가기를 중지하고 다시 개성으로 회군하고 싶었으나. 그럴수도 없어 평양으로 갔다.
그러나 임진 사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함으로부터 만이 개년이 되매. 군대가 지나간 연로의 백성들은 이태 동안이나 농사를 못 짓고 바람에 불리는 풀잎과 같이 유랑하는 도안에 거의 다 굶어 죽어 버리고 말았다.
제찰사 류 성룡(柳成龍)이 동파에 있다는 말을 듣고 죽다 남은 굶주린 백성들이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데리고 동파로 모여 들었다. 그 백성들은 얼굴은 누렇게 부어 오르고 말도 잘하지 못하며. 어떤 사람은 길에서 거꾸러져 죽었다.
그중에도 참혹한 것은 어떤 젖먹이 달린 여자 하나가 기진하여 길에 넘어져 죽은 것을 젖먹이는 어미가 죽은 줄도 모르고 시체의 곁으로 기어 들어 가며 젖에 매달려 빨며 젖이 아니 나온다고 우는 것이었다. 류성룡은 이 광경을 보고 울었다.
이에 류 성룡은 강에 들어 온 전라도 피곡 천석을 풀어 전 군수 남궁제(南宮悌)로 하여금 감진관(監賑官)을 삼아 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하였다.
곡식은 꽤 많이 들어 와 있으나. 이 여송의 대군이 볼일에 다시 올 터이니.
그것을 다 기민 구제에 쓸 수는 없었으므로 쌀을랑 군량으로 두고 피고만을 기민을 구제하라 함이었다.
남 궁제는 백성더러 솔잎을 따오라 하여 솔잎가루를 만들어 그것 한 되에 쌀가루 한 홉을 섞어 물에 타서 먹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하고도 많은 피난민을 다 먹일 수는 없어 그것도 없어. 먹는 사람이 백에 하나도 다 되지 못하였다.
하루는 밤에 크게 비가 내려 한데서 밤을 새우는 굶은 백성들이 울고 신음하는 소리가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 동안에 죽어 쓰러진 사람이 얼만지 이루 셀 수가 없었다.
이 여송(李如松)은 다시 심유경(沈惟敬)을 서울로 보내어 경성의 일본군과 화의를 진행하였다. 이 화의에 관한 것은 조선 조정에는 일체로 알리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류 성룡이하로 조선 대관들은 화의를 배척하는 까닭이었다.
마침내 화의가 성립되어 사월 십 구일에 일본군은 경성에서 철퇴하고 사월 이십 일에 명균이 경성에 들어 왔다.
경성을 철퇴한 일본군은 아무도 따르지도 아니하고 막지도 아니하는 길을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쉬면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작년 진주 목사(晋州牧使) 김 시민(金時敏)에게 진주성에서 패한 설분을 한다 하여 유월에 대군으로 진주성을 포위하여 유월 이십 팔일에 진주성을 깨뜨렸다.
이 싸움에 조선 측으로 군사와 백성 육만 명이 죽고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판관(判官) 성수경(成守璟).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 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 황진(黃進). 의병 복수장(義兵復讐將) 고종후(高從厚) 등이 죽었다. 김천일과 최경회는 촉석루(矗石樓)에 있다가 통곡하고 남강(南江)에 빠져서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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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 시월 초사일에 왕이 서울로 돌아 왔다. 그러나 이때에도 일본군이 전혀 철퇴한 것은 아니요. 울산(울산) 부산(부산). 김해(김해) 등지에 유진하고 있어서 명 나라에 대하여 외교적을 서로 절충하고 있었다. 경상 남도 각지에 유정(劉艇) 등이 거느린 명균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전혀 싸울 뜻이 없고.
오직 민간의 양식을 먹고 부녀를 겁탈하고 행패를 할 뿐이었다. 전라도 곡식을 날라다가 명병을 먹이느라고 전라. 경상. 양도 백성은 부역에 죽을 지경이었다.
왕은 일년 반 만에 서울에 돌아 왔으나. 경복궁. 창덕궁도 다 불타 버리고 종묘도 빈터가 되고 민가도 진고개 기타 남촌에 일본군이 유진하던 테를 제하고 쑥밭이 되어 버려서. 전능골( )월산 대군(월산대군) 살던 집을 임시로 대궐로 삼고 거처하였다. 이때에 어떤 명 나라 장수가 대궐을 지으라고 진언하였으나 왕은.
『깊은 원수를 못 갚았거든 어찌 집을 지으랴.』
하고 짓지 아니하였다.
그리다가 이 정도 행궁은 적군이 있던 부정한 곳이니 차마 오래 거처할 수 없다 하여 경복궁 서쪽 모퉁이에 초가를 짓고 대궐을 삼았다.
쑥밭이 된 서울 북촌의 도처에는 잡초와 가시 덩굴이 황무하여 도적과 짐승이 횡행하고 인왕산과 북악산에는 . 대낮에도 호랑이와 이리 무리가 들끓었다.
왕이 돌아 왔다는 말을 듣고 백성들이 사방으로부터 서울에 모여 들었으나 먹을 것이 없어 길가와 풀밭에 굶어죽는 사람이 날마다 수 없었다. 시월이 지나고 차차 날이 추워지매 굶고 얼어 죽는 사람은 날마다 늘었다. 미처 내다가 묻을 수가 없어 이 골목 저 골목에 쓰러진 시체를 굶주린 개와 고양이들이 서로 싸우며 뜯어 먹었다. 혹은 굶은 어미가 등에 업혔던 어린 자식을 삶아 머고.
혹은 새로 죽은 시체를 뜯어 먹고. 살아 먹고는 중독이 되어 죽는 이도 있었다.
왕은 이러한 교지를 내렸다. 「. (요새 주린 백성을 건질 길이 없으니. 내 하늘을 우러러 슬피 탄식하고 먼저 죽으려 하나 그도 못하노라.)」그리고 왕은 매일 자실 양식으로 백미 육승을 받던 것을.
『내 어찌 차마 세끼를 먹으랴. 서 되쌀도 다 못 먹으려든 여섯 되를 무엇에 쓰랴.』
하여 여섯 되중에서 서 되를 덜어 굶는 백성을 주라 하였다.
서울 안에는 다섯 곳에 진제장(賑濟長)을 벌이고 죽을 쑤어 먹을 것 없는 백성을 구제하였으나. 도저히 다 먹여 낼수가 없었다. 대과에 급제한 사람들도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손에 홍패를 들고 진제장에 나가서 죽을 얻어먹었다.
일본군이 서울에 있을 때에는 혹은 딸을 팔고 혹은 젊은 아내를 팔아서라도 연명할 도리가 있었지마는. 인제는 딸과 아내를 팔려 하여도 살 사람이 없었다.
밥 한 그릇에 과년한 딸을 팔고. 옷 한 벌에 아내를 팔아 버리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부모가 죽어도 거상도 입지 아니하고 도무지 처자니 형제니 하는 생각도 다 없어지고 말았다. 얼마 후에 왕은 초가집을 떠나 정동 계림군(桂林君)집으로 대궐을 삼고. 심의겸 (沈義謙) 집으로 동궁을 삼고. 심연원(沈連源) 집으로 종묘를 삼고. 정동 근방에 있는게 들러 막고 그것을 시어소(時 御所)라고 이름 지었다.
이 순신은 그동안에 축적하였던 쌀과 소금과 고기를 경성으로 실어 보내어 왕 이하로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을 살렸다.
15
이러하건마는 명병 만은 배고픈 줄을 모르고 날마다 술과 고기에 묻혀 지내었다 조선 백성들은 . 산에 올라 풀잎사귀. 풀뿌리. 송기. 느릅나무 껍질과 뿌리를 벗겨 먹어 산이 빨갛게 동탁하였다.
명 나라 군사가 술이 취하여 길바닥에 토하여 놓은 것을 백성들이 다투어 헕아 먹고 힘이 약하여서 못 얻어먹은 이는 곁에 서서 울었다.
큰 소 한 마리에 쌀 서 말. 세목 필에 조두 되. 길에 나와 노는 어린 아리를 잡아다가 삶아 먹고. 심하면 산 채 다 뜯어 먹어서 아이를 혼자 내어 놓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크게 병이 돌아 날마다 죽는 사람을 미처 파묻을 수가 없어서 시구문 밖까지 끌어다가 내어 버린 송장이 산더미같이 쌓여서 수십 길 높이가 되었는데. 어떤 평안도 중 오륙인이 와서 구덩이를 여러 개를 파고 한 구덩이에 수백 명씩 묻고 재를 올렸다.
뭇 백성들의 부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소위 사대부집 부녀들도. 혹은 일본 군사들에게 겁탈을 당하여 낳은 자식이 뉘 자식인지를 알 수 없어서. 화단을 면한 집들에서는 화단을 당한 집과 혼인을 아니 하려 하였다. 만일 이러다가는 대다라는 대가에서는 자녀를 혼인할 길이 없으리라 하여. 왕은 종실과 귀척으로 하여금 먼저 난 만난 집 자녀들과 혼인하게 하였다.
부녀들 주에는 겁탈을 아니 당하려 하여 반항하다가 죽은 이. 미리 죽은 이.
남편의 뒤를 따라 죽은 이. 부모의 뒤를 따라 죽은 이도 많았다.
장홍(張鴻)이란 자는 자기의 처가 적에게 반항하여 정절을 잃지 않고 죽었다고 왕께 상소하여 열녀로 정문까지 내렸으나 후에 황신(黃愼)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일본군에게 포로되었던 조선 부녀의 명부를 가져 오매 그 속에 장홍의 이름도 든 것을 보고 모두 장홍을 비웃었다.
난리가 처음 날 때에 어떤 사람이 점을 쳐서 송(訟)이라는 패를 얻었는데 「.....) (주검이 삼스러진 듯하도 피는 흘로 공이를 띄우리라. 사람들이 제 어미는 알아도 아비는 알지 못하리라. 그런 뒤에야 싸움이 끝나리라)」한 것이 맞았다고 하였다.
아무 준비도 없이 밤낮 당파 싸움만 하다가 갑자기 싸움이 터지니 나라에 경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벼슬 팔기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쌀 백 섬에 삼품. 삼십 섬에 오품. 이모양으로 값도 상당하였으나. 전쟁이 일년이 넘어서부터 쌀 열 섬. 스무 섬에 통정대부. 가선 대부를 준다 하여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판에 있어서 오직 이 순신이 계사년 칠월에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수군 톤베가(忠淸. 全羅. 慶尙.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한산도(閑山島)에 본영을 두고 삼도 연해 각고을 각섬에 유리하는 백성들을 모아 혹은 농사를 시키고. 혹은 소금을 굽게 하고. 혹은 고기를 잡게 하고. 혹은 짐승을 치게 하고. 또 혹은 대를 심어 화살을 만들게 하고 혹은 . 항왜로 하여금 조종. 기타 일본식 무기를 만들게 하고. 혹은 병선을 새로 짓고 낡은 것을 수리하게 하여. 조선 천지를 등에 짊어진 듯한 힘을 썼다. 전라도 경상도의 모든 섬과 연해 각 고을에는 오직 난리의 근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무지 의식의 걱정이 없이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럴 뿐더러 왕이하로 서울 조정에서 공담과 공론으로 쓸데없는 싸움을 하고 앉았는 무리들의 입에 칠하는 풀도 이 통제로부터 혹 강으로 실어 올려 보내는 쌀로 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