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 10 (01~05)

1

이 순신이 바다에서 적의 수군과 싸워서 연전연승하는 동안에 왕과 및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어찌하였나. 장차 한산도(閑山島)의 큰 해전을 말하기 전에 그동안 왕이 쫓겨 가던 이야기를 하자.
사월 삼십일.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영 앞에 이 순신 막하의 수군이 진을 치고 장차 전선을 향하여 출동하려고 파리강의 대회의를 하던 날 순변사 이 일(李鎰)의 상주(尙州) 패군 장계를 보고 비 오는 밤에 왕이 서울을 버리고 비를 맞으며 돈의문을 나서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쫓겨 가는 지향없는 길을 떠났다는 것은 벌써 말하였다. 바길을 걸어 박석 고개(고개)에 이르니 날이 새었다. 고개에 올라 서서 장안을 돌아보니 화광이 충천하였는데 니것은 백성들과 군사들이 원망의 초점이던 남대문 안 창고에 불을 놓은 것이었다.
반석 고개를 넘어 돌다리(돌다리)에 이르니 다시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군사 수십인을 데리고 따라 왔다. 이때에는 수인이라는 것도 적지 아니한 것이었다. 모두 슬몃슬몃 달아나는 판에 적지 아니한 기쁨이 되고 의지가 되었다.
벽제관(碧蹄館)에 이르러서는 비가 퍼붓는 듯하여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었다.
『잠간 비를 거어 가심이 어떠하올지?』
하고 웃소매와 수염에까지 물이 줄줄 흐르는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왕께 아뢰었다. 왕도 입은 옷이 온통 살에 달라 붙었다.
『그렇게 지체해서 되겠소?』
하면서도 왕도 떨리는 사지를 진정치 못하여 벽제역(碧蹄轢)에 들어 갔다.
그러나 역에는 역승(역승)도 역졸도다 달아나고 오직 눈꼽 낀 노파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죽기를 무섭게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 노파뿐인 듯하였다. 노파는 왕이 어느 양반인지도 모르는 듯이 말 없이 바에 앉아서 이 이상 행인 일행을 그리 흥미도 없는 듯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왕은 잠시 들어 앉았으나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를 아니하여 곧 가자고 재촉하였다. 일행은 또 이곳을 떠났다. 말들도 밤새 먹지도 못하고 달려 와서 고개만 내어 두르고 굽으로 땅을 팔 뿐이요. 잘 가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왕을 따르는 귀족. 고관들도 혹은 발이 부르렀다고 하고 복통이 난다고 하여 일행에서 떨어져서 서울로 돌아 가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서울에 남겨 두고 온 좋은 집과 풍성한 먹을 것과 아름다운 처첩을 생각하였다. 따뜻한 술과 몸 보하던 약을 먹을 생각을 하면 껄렁껄렁하게 되어 쫓겨 나는 왕을 따라 이 찬 비를 맞고 가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다. 또 실상 말 하나도 얻어 타지 못한 군졸들은 발이 부르트고 다리가 나무때기 같이 되었다 걸을래야 걸을 수가 없는 자도 있었다.
종묘 위패를 몰아 태운 가마 하나가 앞을 서고 그 다음에 말을 탄 왕이 서고 다음에 영의정 이 산해(李山海).좌의정 류성룡(柳成龍)등. 종친들이 서고 중간에 왕비 기타 종실 부인들과 . 몇 개 궁녀들이 혹은 타고 혹은 긷고. 그 뒤를 이러 금관자. 옥관자들이 섰다. 얼마 가다가 뒤를 돌아 보면 몇 명이 떨어지고 또 얼마를 가다가 뒤를 돌아 보면 또 몇 명이 떨어지고 또 얼마를 가다가 뒤를 돌아 보면 또 몇 명이 떨어지고 또 얼마를 가다가 뒤를 돌아 보면 또 몇 명이 떨어졌다. 심지어 시종(侍從)이니 대간(臺諫)이니 하는 자글까지도 많이 떨어져 버리고. 일행의 사람 수효는 갈수록 줄었다. 마치 양식 준비 없는 앞길을 위하여 일행을 주리는 것 같았다.
혜음령(혜음령)에를 올라 갈 때에 빗방울이 굵기가 우박과 같은 것이 때마침 부는 서풍에 왕 이하로 일행의 면상을 사정 없이 두들겨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약한 말을 탄 궁녀들은 옷자락을 머리에 써서 빗방울의 아픔을 막으면서 소리를 내어서 통곡하였다. 날이 저물었다. 내려 두드리는 빗발 사이로 호호탕탕한 임진강(臨津江)이 번득거렸다.
『저 강만 건너면야.』
하고 왕이나 신하나 이 강을 건너는 것이 큰 피난이나 되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잔뜩 물을 먹은 강 언덕의 흙은 결코 일행을 환영하지 아니하였다. 무론 땅에는 말 발굽이 쑥쑥 들어 가고 단단한 땅은 얼음판과 같이 미끄러워서 말들은 무릎을 꿇고 사람들은 나자빠졌다.

2

말과 사람이 반 넘어 개 흙투성이가 되어서 겨우 임진강에 다다랐다. 강물은 비에 불어서 흐린 물결이 소리를 치며 달려갔다. 그것은 실로 처참한 경치였다.
천신 만고로 왕은 배에 올랐다. 따르는 신하들도 반신은 물에 담그며 배에 오르고 부녀들은 마치 송장 모양으로 정신없이 남자들에 안기기도 하고 끌리기도 하며 배에 올랐다. 이 판에 하나도 떠내려 간 사람이 없는 것이 믿을 수 없이 이상한 일이었다. 왕은 작은 배의 뱃전을 꽉 붙들고.
『수상과 좌상은 어디 갔나?』
하고. 마치 잃어 버린 의지할 사람을 찾는 듯이 이 산해와 류성룡을 불렀다.
두 사람이 왕의 곁에 가매 왕은 한 손에 이 산해를 한 손에 류 성룡을 팍 붙들었다. 두 사람은 왕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다. 이것을 보고 창황중에도 서인(西人)들은 동인인 이 산해와 류 성룡을 밉게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도승지 이 항복(李恒福)만은 그렇지도 아니하나. 이조 판서 유홍(兪泓)과 찬성 최홍원(최홍원)은 이산해. 류 성룡을 아무러한 기회에라도 한번 골리려는 생각을 임진강 비를 맞으면서도 떼어 놓지 아니하였다.
이럭저럭 강은 건너 왔다. 그러나 이 어두운 그믐밤에 비까지 내리니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어디가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 성룍은 도승청(渡丞廳)에 불을 놓기를 명하였다. 도승청이란 임진강 나루를 맡은 도승이라는 벼승하치의 관정이다. 비가 오건마는 이 묵은 큰 집에는 불이 붙어 강북까지도 환히 비치어서 길을 찾을수가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좋은 묘책이라고 모두 칭찬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이 도승청에 불을 놓기 때문에 쫓겨가는 길을 찾은 것도 고마운 일이어니와. 적병이 뒤를 따를 때에 떼를 모을 재목을 없이 한 것도 좋은 일이었다.
초경에 동파역(東坡轢)에 다다르니 거기는 파주 목사(波州牧使) 허진(許晋).
장단 부사(長端府使)구 효연(具孝淵)이 지대 차사원(支待差使員)으로 이곳에 있어서 왕이 하루 먹을 음식을 갖추어 음식을 갖추어 가지고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굶고 길을 걸은 호위인(扈偉人)들은 역사에 들자 음식 냄새를 맡더니 문득 미친 사람같이 날뛰어서 부엌으로 달려들어 주먹 다짐으로 서로 빼앗아 먹고 상감 자실 것과 점잖은 대관들 먹을 것이라고는 한 알갱이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입에 밥풀을 발라 가지고 한 주먹이라도 더 먹겠다고 아우성하는 꼴은 과연 아귀인 듯하였다.
『조곰도 안 남았나?』
하고 배고픈 왕은 수상을 향하여 물었다. 이 산해와 류성룡은 왕의 이 말에 낙루하고 궁녀들은 통곡하였다.
『왜들 우느냐?』
하고 왕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왕과 대관들은 이 밤을 굴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파주목사 허진은 왕에게 져녁밥 못 드린 죄를 두려워 하면 도망하고.
상감이 잡숫기도 전에 먼저 다 먹어 버린 호위하는 군사들은 먹고 나서야 죄 지은 줄을 알고 에라 빌어 먹을 것. 따라 가면 별수가 있느냐. 경칠 것 밖에 남은 것이 있느냐 하고 밤 동안에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이튿날인 오월 초하루에 왕과 그 일행이 길을 떠나서 개서으로 향하려 하나.
서울서 데리고 온 군사와 나중에 경기 감사 권징이 데리고 온 이졸들도 말을 훔쳐들 타고 하나 없이 달아나서 호위할 사람이 있나. 손발 잘린 사람들 모양으로 우두커니 동파역에 앉아서 행여나 누가 오나 하고 기다리기를 저녁때까지 하였다.
『그냥 걸어서 떠나지?』
하고 왕은 적병이 따라 올 것이 두려워서 재촉하나 일리를 못 걸어 본 왕이나 왕비나. 늙은 재상들이 걸음을 걷자는 것은 망계였다.

3

이웃 동네에 사람을 보내어 보았으나 반 이상은 나 피난을 가버리고. 설사 남아 있는 백성들이 있댔자 왕과 대관들이 저꼴이라면「잘쿠산이」할 뿐이요.
누구 하나 나서서 그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려는 이는 없었다.
웬 농부 하나는 관인을 보고 꾸짖었다.
『잘들 호강했지. 저희들이 우리 위해 한 일이 무에야? 저희들이 생전에 누구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해보았던가.』
『밭을 한 이랑 갈았나. 논에 풀 한 대를 뽑아 보았나. 백성들의 등을 긁고.
나라를 망해 놓은 것 밖에 한 일이 무에냐 말야. 무슨 낯에 누구더러 오라 가라.......』
백성을 짓발하러 갔던 관인은 겁이 나서 동파역으로 돌아 와 웬 농부 하나가 꾸짖던 말을 일동(왕까지도 한방에 앉은 일동이다)에 보고하였다. 모두 말 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반나절이 되어서 황해 감사(黃海監司) 조 인득(趙仁得)이 본도 병마를 거느리고 왔는데. 서흥 부사(壻興府使)남의(南義)가 군사 수백인과말 오륙십 필을 가지고 먼저 왔다. 왕과 일행이 재생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왕은 초췌한 얼굴에 다시 살아 난 웃음을 띄우고 친히 남의의 손을 잡고 그 충성을 칭찬하였다.
『자. 떠나자.』
이만하면 왕의 행차의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일행 중에 누구가 우선 아까 버릇 없는 말을 한 늙은 농부를 잡아다가 물고를 내이고 가자고 하였으나. 지금 그러할 사이가 있느냐 하여 파의가 되었다.
일행이 떠나려 할 때에 사약(사약) 최 언준(崔彦俊)이 가 나서며.
『궁중인이 어제도 종일 못 먹고 오늘도 종일 못 얻어먹었으니. 어떻게 길을 가오? 어디서 쌀을 좀 얻어다가 요기나 하고 가야겠소.』
하였다.
이말에 잠시 배고픈 줄도 잊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사지에 기운이 빠져서 땅 속으로 찾아 들어가는 듯하였다.
황해도 군사들이 가진 군량 대소미 섞인 쌀 두어 말을 얻어서 일지도 아니하고 밥을 지어 우선 궁인들만 요기를 시켜 가지고 길을 떠나 오시쯤 하여 초현참(招賢站)에 다다르니. 거기는 황해 감사 조 인득이 백관들은 서울을 떠나서 쫓기는 길을 나선 후로 비로소 밥을 얻어 먹었다. 모래가 반이나 섞이고 밑은 타고 위는 설어 단 냄새가 나는 밥. 게다가 구더기가 둥둥 뜨는 된장국.
그러나 이것도 서울서 머던 고량진미보다 맛이 좋았다 저녁때에 개성에 다 달라서 왕은 남문 밖 공서에 들고 따라 가는 백관들도 각각 이웃 민가에 숙소를 정하였다. 길에서 비를 맞고 밥을 굶고 말 탄 자는 꽁무니가 아프고 걸은자는 발이 부풀어 쥐죽은 듯하던 작자들도 개성 같은 큰 도시에 표안히 자리를 잡고 보니. 새로 기운들이 나서 저녁 밥상을 물리기가 바쁘게 동인.
서인에 당파 싸움을 벌리기 시적하였다. 벽제관과 임진강에서도 무슨 생각이 났던지 달아나지 아니하고 따라왔던 몇 개 대간이라는 무리들이 기세가 당당하게 영의정 이 산해를 탄핵하였다. 그 이유는. 영의정이 국사를 그릇하기 때문에 나라가 적의 고초를 당한다는 것이었다. 아아. 그들은 서울서 개성까지 오는 동안에 저 배 고프고 제 다리 아픈 책임을 영의정 이 산해라는 동인 늙은이에게 풀려 한 것이다. 그들은 이 산해라는 동인 늙은이에게 풀려 한 것이다. 그들은 이 산해보다도 류 성룡을 더 미워하였지마는 한꺼번에 둘을 맞히려는 것은 전술상 불리한 줄을 알기 때문에 우선 이 산해를 건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한 늙은이를 잘 자리를 잡는 길로 파직한다는 것은 보통 인정으로 못할 일이었다. 왕에게는 이 인정이란 것이 있었다.

4

이튿날 아침을 먹기가 바쁘게 대간은 다시 영상 이 산해를 탄핵하였다. 왕은 마침내 이 산해를 파하고 좌의정 류성룡으로 영의정을 삼고 최흥원(崔興源)으로 좌의정을 삼고 윤두수(尹斗壽)로 우의정을 삼았다. 그러나 류 성룡이가 수상이 된다는 것은 서인들에게는 더욱 견디지 못할 일이었다.
서인들의 말에 의하면. 신묘년에 일본에 보내었던 사신 황 윤길(黃允吉). 김 성일(金誠一) 두 사람 중에 서인인 황 윤길은 반드시 일본이 불원에 우리 나라를 침범하리라고 바로 보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만일 황 윤길의 말대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범할 것을 믿고 병비를 하였던들 오늘날 이 꼴이 되었을 리가 있느냐. 그런데 동인인 김 성일이가 부사이면서도 정사인 황 윤길의 말에 반대하여 결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버하지 아니하리라. 평수길은 아주 하잘 것 없는 인물이라고 한 것을 이 산해. 류 성룡이 제 당파에 일편된 사곡한 마음으로 김 성일의 말을 옳게 여기기 때문에 오늘날 나라를 그르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산해를 탄핵한 「교걸 오국(交結誤國)」이라는 죄는 당연히 류 성룡도 질 것이라고 해서 또 들고 일어나서 오늘 아침에 새로 난 영의정 류성룡을 탄핵하였다 실로 동인편에서는 . 서인들의 이 논죄에 대하여서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일본이 침범하지 아니하리라고 김 성일의 말을 믿은 것은 분명히 이 산해와 류 성룡의 비록 죄까지는 아니라고 치더라도 밝지 못함이라는 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왕은 평소에 그렇게 믿어 오던 이 산해와 류 성룡을 동시에 파하기가 난처하였으나. 또한 다수 서인들의 앙탈을 막을 힘도 없어서 그날 저녁때에 류 성룡을 파하고 최흥원(崔興源)으로 영의정을 삼고. 윤두수(尹斗壽)로 좌의정은 사고. 유홍(兪泓)으로 우의정을 삼았다. 유흥은 서울을 버리기를 크게 반대하면서도 맨 먼저 처자를 관북으로 피난시킨 위인이다.
개성에 와서 하루를 무사히 지내니 왕을 따라 온 백관들은 서울을 버리고 떠난 것을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두고 온 집과 처첩이 그리웠던 것이다. 왕도 이 사람들의 말에 감동이 되어서 서울을 떠난 것을 후회하였다. 그리고 승지 신집(申潗)을 서울로 보내어 서울 형편을 알아서 곧 귀한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신 집이 임진강을 다 건너기도 전에 오웕 초삼일에 서울은 적병의 손에 들어갔다.
서울은 어떻게 함락이 되었나 - 유도 대장(留都大獎)이 양원(李陽元)은 성중을 지키고. 도원수(도원수) 김명원(김명원)은 한강을 지켰다. 남을 hdhf라 오는 적병이 서울에 들려면 한강을 건너야 할 것은 이 양반들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월 삼일. 해가 낮이나 되어서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가 제천정(濟川亭)에 앉아서 유월 염천에 서늘한 바람을 쪼이면서 미희로 하려금 술을 따르게 하고 종사관으로 더불어 시를 짓던 것이다. 이분네가 도원수라 하나 병법을 알 리가 없어서 척후를 쓰지 아니하니. 적병이 앞고개 너머까지 와도 알지 못하고 운자를 다노라고 애를 쓰다가 적구이 강 저편에 온 것을 보고는 군기와 화포와 모든 기계를 강중에 집어넣고 도원수의 옷을 벗어 버리고 미리 준비하였던 패랭이를 쓰고 짚신을 신고 도망하였다. 종사관(종사관) 심 우정(沈友正)이.
『대감이 국가의 간성이 되어서 도성을 지키다가 싸워서 죽을지언정 어디로 간단 말이요?』
하고 명원의 소매를 붙들었으나 명원은.
『가서 행재를 지켜야 하지.』
하고 소매를 뿌리치고 달아났다.
『에끼. 게 같은 자식!』
하고 종사관 심우정은 김명원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로 내지르고 혼자 잔병을 데리고 적병을 막다가 죽었다.

5

유도 대장 이 양원이 성중에 있다가 한강을 지키던 도 원수 김명원(金命원)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단 말을 듣고 자기도 아니 달아날 수 없어 성을 버리고 양주(楊洲)로 갔다. 오직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가 불과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주(麗州)를 지켜서 적병이 삼사일을 강을 건너지 못하였으나. 원호가 강원도 순찰사 유영길(柳永吉)에게 불려 본도로 돌아가매 다시는 강을 지킬 사람이 없어서 적병은 여염 민가를 헐어 그 재목으로 떼를 모아 타고 강을 건넜다.
이라 하여 삼로 적병은 아무 저항 없이 한강을 건너 마치 제 고향에 들어 가듯이 서울에 들어 왔다. 이 모양으로 싱겁게. 참 싱겁게 서울이 적병의 손에 들었다. 서울로 향하는 적병을 막으려는 한 큰 군사- 오만의 대군이 있던 것을 여기서 한 마디 말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 오만 대군이라는 것은 곧 삼도순찰사의 군이다.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光).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尹國馨).
경상도 순찰사 김수(金粹)의 연합군- 이군은 본래 밀양이 함락되었다는 기별을 듣고 대고 달아난 위인들이다 -의 군관 십여인을 합한 것이니. 군사 수효가 오만이 넘었다. 그중에도 대부분은 용맹이 있고 잘 싸우기로 이름 있는 전라도 군사다. 애초에 이 광이 전라도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도우려 오다가 왕이 서쪽으로 달아났다는 기별을 듣고 싸우지도 아니하고 전주로 돌아 갔었다.
이것을 보고 전라도 사람들니 다 분개하게 여겨 이 광에게 대하여 불평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광도 생각해 보면 마음이 편안할 수는 없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충청도 군사와 연합하여 서울로 향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 광이 전라도 군사를 거느리고 온 것이 아니라. 전라도 군사가 이 광을 떠밀고 온 것이었다.
이 삼도 순찰사군 오만 대병은 충주(忠州)로부터 죽산(竹山)을 거치어서 오는 적병을 막을 양으로 용인(龍仁)으로 향하였다.
용인에 이르러 바라보니 북두문(北斗門) 산성에 적병이 쌓은 듯한 작은 누(壘)가 있었다. 광은 첫째로 험한 곳을 택하여 진을 치고. 둘째로 용인 성내에 적의 형세가 어떠한지 염탐해 보려고도 아니하고 수하에 있는 오만 명 군사를 밀어 다짜고짜로 용사로 이름 있는 백광언(白光彦). 이 시례(이시례) 양인은 수백 명의 선봉을 거느리고 북두산에 올라 가 적루에서 십여 보나 되는 곳에서 말을 내려 누를 향하여 활을 몇 방 쏘았으나 적병은 도무지 빛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백광언. 이 시례 등은 적병이 자기네가 무서워서 나서지 못하는 줄만 생각하고 의기 양양하여 소리를 지르며 싸움을 돋구었다.
두 선봉장과 군사들이 모두 마음을 놓아 혹은 활을 벗어 걸고 혹은 웃통을 벗고 땀을 들이고 있을 때에. 갑자기 고함소리가 나며 서리 같은 긴 칼날을 내어 두르고 누로부터 일대 적병이 달려 나와 시살하였다. 광언. 시례 등은 창황히 달아나려고 각기 제 말을 찾다가 미처 찾지 못하고 적병의 칼에 죽고 군사들도 거의 함몰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군중이 크게 놀래었다. 더욱 놀란 것은. 세 순찰사와 서울서 내려 온 군관들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적병 사오인이 머리에 흰 수건을 동이고 긴 칼을 내어 두르며 오만 대군을 향하여 달려 오니. 좋은 말이 있는 순찰사와 군관들은 기운차게 채찍을 둘러 달아났다. 장사 없는 군졸들은 군자와 기계를 내어 버리고 그들의 용감한 장수들의 뒤를 따랐다. 오만 대병이 무너지는 소리가 산 무너지는 소리와 같았다. 이 광(李光)은 무사히 전주(全州)에. 윤국형(尹國馨)은 공주(公州)에. 김 수(金粹)는 경상 우더에 각기 탁족이나 시회하려 갔던 사람 모양으로 돌아 가서 선화당에 들어 앉았다. 그리고 용인 오만 대병이 앉았던 자리에는 군자. 군기가 무수히 길을 막아서 사람이 통행할 수가 없으므로 적병들은 이것을 모아 놓고 불을 갈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