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 14 (31~3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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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사흘 맑다. 일찍 남쪽 가는 길을 떠나다. 금부 도사 이 사빈. 서리 이 수영. 나장한 언향은 먼저 수원부로 가고 나는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고 저물게야 수원에 다다랐다. 신복룡이 우연히 왔다가 내 길을 보고 술을 내어 나를 위로하였다. 부사 유영건이 나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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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흘. 맑다. 일찍 떠나 독성 밑에 이르니 반자 노발이 진 위에서 와서 오산 황천상의 집에 막을 치고 술을 차려 놓고 기다렸다. 황이 짐이 무겁다 하여 말을 내어 실어다 주었다. 참말 고마운 일이다. 물여울을 지나 평택현이 내은 손의 집에 들었다. 대단히 은근하게 대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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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오일. 맑다. 해 뜨개에 길을 떠나 선산에 나 배꼭하고 이어 뇌(장조카)의 집에 가서 선묘에 배례하였다. 남양 아저씨가 돌아 가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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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육알, 맑다. 원근에 있는 친지들이 다 와서 오래 막힌 인사를 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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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칠일. 맑다. 금부 도사가 아산으로부터 왔다기로 내가 가 보니 대단히 은근하게 대접하였다. 홍 찰방이 오고 이 별좌와 윤효원이 찾아 왔다. 금부 도사는 홍백의 집에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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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구일. 맑다. 동네 사람들이 저마다 술병을 차고 와서 멀리 가는 길을 위로하였다. 정에 막을 수 없어 더할 수 없이 취한 뒤에야 말았다. 도사도 술을 잘 먹으나 체면을 잃지 아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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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십일. 맑다. 식후에 홍백의 집에 가서도사와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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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일일. 맑다. 새벽에 꿈자리가 대단히 사납다. 병중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른다. 종놈을 보내어 소식을 들어오라 하였다. 도사도 온양에 갔다.)
여기 한 마디 말할 필요가 있다. 순신은 초계(草溪)에 옮은 권 율의 진으로 향하는 길에 고향에 둘러 분묘와 사당에 참배하였으나 그의 모 부인은 아직도 전라도 순천부에 있던 것이다. 순신이 한산도에 통제사로 있는 동안에 모 부인을 순천에 있게 하고 공무의 여가를 타고 배로 근친하던 것이다. 아주 한산도나 또는 더 가까운 곳에 모시지 아니한 것은 다른 장수들이 멀리 가족을 떠나 있는 정경을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 모 부인은 순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슬퍼서 병이 생긴 것이었다. 그러다가 순신의 꿈자리가 사납던 바로 그날 곧 십일에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十二日 . . . . . . . .)
(십이일. 맑다. 종태문이 안홍 뜰로부터 들어와 편지를 전하였다. 초아흐렛날에는 어머니와 집안이 다 무사히 안홍에 배를 타고 왔다고. 아들 울을 먼저 행정으로 보내었다.)
순신의 어머니는 순신이 잡혀 간 뒤에 얼마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고향을 향하고 길을 떠난 것이었다.

32

순신은 그 어머니의 부음을 듣던 날을 이렇게 일기에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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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삼일 맑다 아침을 먹고 어머니를 마중하러 해정을 향하여 떠났다. 가는 길에 홍 찰방 집에 둘러 잠시 이야기하노라니 울 (순신의 아들 - 작자의 말) 애수 (순신의 손자 - 작자의 말)를 보내어 말하대. 아직 배 들어 왔다는 소식이 없다고. 또 들은즉 황천상이 홍백의 집에 왔다 하기로 홍 찰방과 작별하고 홍백의 집에 갔다. 이윽고 종 순화가 배를 타고 와서 배 위에서 어머님의 부음을 고하였다. 뛰어 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고 하늘이 캄캄하여졌다. 곧게 바위로 달려 가니 배가 벌써 닿았다. 아프고 쓰림을 어찌 다 기하랴.)
하고. 이 일기 끝에는「( )(뒤에 적었다)」이라고 잔 글자로 적었다.
그날은 일기할 정황이 없고 후일에 추측하였다는 말이다.
십 사일에는 관을 짓다는 말이 있고. 십 오일에는 입관하였다는 말과. 오 종수(吳從壽)란 사람이 진심으로 호상하였다 하여 분골 나낭이라 하고. 천안 원이 왔단 말과 전 경복(全慶福)이란 사람이 연일하여 진심으로 상복을 만들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쓰고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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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육일. 흐리고 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개에 옮겨매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본가로 돌아 왔다. 고향을 바라보니 아프고 슬픔을 어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하니 비가 퍼붓는다. 남쪽으로 갈 기약이 또 박두하니 우짖고 우짖으며 오직 어서 죽기만 기다릴 뿐이다. 천안원이 돌아 갔다. 추록.) 이렇게 썼다. 앓는 어머니가 돌아 오기만 날을 꼽고 고대하다가 마침내 영구를 모시고 비를 맞으며 옛집으로 돌아 가는 그의 슬픔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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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칠일. 맑다. 금부 서리 이 수영이 공주로부터 와서 길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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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팔일. 비. 종일 비 오다. 마음이 심히 불평하다. 다만 빈소에 곡하고 물러 나왔을 뿐이다. 추록. )
마침내 죄인인순신은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금부 관원에게 끌려 길을 떠나지 아니하지 못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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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구일 맑다. 일찍 길을 떠났다. 영연에 곡하였다.)
천지에 어디 나와 같은 일이 있으랴! 일찍 죽음만 못하다. 뇌의 집에 이르러 선묘에 하직하고 길을 떠나 보산원에 이르니 천안 원이 먼저 와서 냇가에 말을 내려 쉬이고 있었다. 임천군수 한 술도 상경하는 길에 앞길로 자나다가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들어 와 조상하고 갔다. 아들 회. 면과(조카들) 봉. 해. 분 완과 변주부가 천안까지 따라 오고 원인남도 와 보았다. 작별하고 말에 올라 일신역에 이르러 갔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추록.)
이십일에 공주(公州)에서 조반하고 금부 도사를 만나고. 이십 일일에 은원(恩院)에 다다르니 김 익(金瀷)이란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임 달영(任達英)이란 자가 무곡을 하러 사진포(思津浦)에 왔다는 데 그 형적이 수상하니 조심하라고 충고하였다. 아마 순신을 암살하러 보낸 자객으로 의심한 모양이었다.

33

이십 일일에 여산(廬山) 관노의 집에 숙소를 정하였다. 밤에 순신은 심사가 불평하여 홀로 일어나 앉아 국사와 어머니를 생각하고 울었다.
이십 이일에 삼례(參禮) 역리의 집에서 자고 저녁때에 전주(全州) 감영에 들어가 남문 밖 이의신(李義臣)의 집에 들었다. 판관 박근(判官朴勤)이 와 보고 부윤도 후대하였다.
이십 삼일에 일찍 떠나 오원(烏原) 파밭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에 일실현(任實縣)에 이르러 의례로 현감을 만났다. 현감은 홍언순(洪彦純)이었다.
이십 사일. 맑다. 일찍 떠나 남원(南原)에서 십리 되는 이 희경(李喜慶)의 집에서 잤다.
이십 오일. 비가 올 듯하다.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나 운봉(雲峰)박용(朴龍)의 집에 드니 비가 크게 내려 머리를 내어 밀 수가 없다. 들은즉 원수는 이미 순천(順川)으로 향하였다고 한다. 곧 사람을 금부 관원의 하처로 보내고 머물기로 하였다. 원은 병이라 하여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십 육일. 흐리다.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나 구례(求禮)현손인 필(손인필)의 집에 들었다. 원이 급히 나와 보고 대단히 은근하게 대접하였다. 금부 관원도 와 보았다.
이십 칠일에 순천에 도달하였다 그날 일기를 그대로 적자 -.
(二十七日......)
(이십 칠일. 맑다. 일찍 떠나 순천 송원에 다다르니 이득종. 정선이 와서 기다린다. 저녁에 정원명의 집에 이르니 원수가 내가 온 것을 알고 군 관권 승경을 보내어 조상하고 또 문안하고 위로하는 말이 심히 간절하다. 저녁에 원이 와 보았다. 정 사준도와서원공(원균을 가리킨 말 -작자)이 패망 전도하는 모양을 많이 말하였다. )도원수 권율은 통제사로 내려 온 뒤의 원균의 소위를 보고 벌써 불안한 생각을 가지고 이순신의 아까움을 깨달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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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팔일. 맑다. 도원수가 또 군관 승경을 보내어 문후하고. 또 상중에 몸이 곤할 터이니 기운이 소복되거든 나오라고 전하였다.) 그래도 도원수 권율은 이 순신을 알아 대단히 친절하게 대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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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초이일 저녁에 맑다. 원수는 보성 가는 길에 병사는 본영에 가는 길에. 순사는 담양에 가는 길에 와 보고 갔다. 부사도 와 보았다. 진홍국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흘리며 원균의 일을 말하였다. 이 형복. 신 홍수도 왔다. 남원 관노 끝 돌이가 아산으로부터 와서 영연이 평안하시다는 말을 전하였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비통함을 견디지 못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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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삼일. 맑다. 이 기남이 찾아 왔다. 울(순신의 아들-작자)의 이름을 열자로 고쳤다. 열은 움이 비로소 나서 초목이 성장한다는 뜻이니 대단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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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사일 비 이날은 어머니 생신이다. 슬픔을 어찌 견디랴. 닭 울 때에 일어나 울 따름이었다. 오후에 큰 비가 왔다. 정 사준이 오고 이 수원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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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오일. 맑다. 아침에 부사가 와 보다. 저녁에 충청 우후 원 유남이 한산도로부터 와서 원공의 패망한 일을 많이 말하고. 또 말하기를 진중 장졸이 이반하여 형세가 장차 어찌될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34

오월 초이레. 정혜사(定慧寺) 중 덕수(德修)가 와서 순신에게 짚신 한 켤레를 바치는 것을.
『내가 그것을 받을 까닭이 있나!』
하여 거절하였으나 늙은 중은.
『소승이 가나하여 대감께 바칠 것이 있으오니까. 손수 삼은 짚신 한 켤레라도 정성으로 드리는 것을 아니 받아주시면 소승이 수백리 길을 대가을 뵈오려 올라 온 정성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 오니까.』
하여 재삼 간청하므로 순신은 노승 덕수의 정성에 감격하여 값을 주고 그 짚신을 받았다. 정혜사는 충청도 예산(醴山)에 있는 절이다. 이 중은 이 순신이 아산에 왔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찾아 왔다가 순신이 떠났다 하므로 뒤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순신이 자기가 삼은 짚신을 받아 발에 신어 보는 것을 보고 기뻐 눈물을 흘리며 합장하고.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마하살.』
을 수없이 부르고 물러갔다. 이튿날인 팔일에는 수인(守仁)이라는 늙은 중이 두우(杜宇)라는 젊은 중을 데리고 찾아 와서 순신을 보고 절하며.
『소승은 대감 같으신 나라의 기둥 되는 양반께 드릴 것이 없사와 소승이 데리고 있던 두우를 데리고 왔소. 이애는 밥을 잘 짓고 또 소찬을 정결하게 만들 줄 아오니 대감 곁에 두시고 조석 시봉을 하게 하시오.』
하였다.
순신이 산중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소찬 만드는 중을 데려 온 것이었다.
순신은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수인은 두우를 떼어 두고 가 버렸다.
이날 통제사 원균의 조상하는 편지가 순신에게 왔다. 이것은 도원수 권율이 명령한 것이었다.
삼일에 큰 비가 내렸다 주인이 . 햇 보리밥을 지어 순신에게 드렸다. 십 일일에 체찰사(體察使) 이 원익(李元翼)의 군관 김성(金惺) 이 순천에 왔다. 체찰사도 일간 순천에 오리라는 말을 전하였다. 체찰사 이원익은 이 순신을 믿고 아끼는 사람이었다. 체찰사 부사(副使)가 순신을 보기를 청하였으나 순신이 몸이 불편하여 보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순신은 이 원룡(李元龍)을 보내어 부사에게 문안하였더니 부사는 김덕린(金德麟)을 보내어 부사에게 문안하였다. 김덕린은 김덕령(金悳齡)의 아우다.
그날 저녁에 순신은 향사 당에 부사를 찾아 밤이 삼경이 되도록 이야기하였다.
부사는 상사나리 상공이 자기에게 하는 편지에 일을 많이 한탄하였다고 하였다.
십 사일에 순신은 순천부를 지나 솔 퇴(솔퇴)를 넘어 운봉(雲蜂)을 거쳐 찬수강(粲水江)을 건너 저물게 구례(求禮)에 다다랐다. 체찰사 이 상공이 진주(晋州)로 가는 길에 일간 구례에 온다는 말을 듣고 순신은 체찰사를 만나기 위하여 구례에 머물렀다.
십구일에야 체찰사가 곡성(谷城)으로부터 구례에 들어온다 하므로. 순신은 죄인으로서 성중에 있는 것이 미안하다 하여 동문 밖 장 세호(張世豪)의 집으로 옮고 그 뜻을 현감에게 고하였더니 현감이 곧 찾아 와서 보았다.
그날 저녁때에 체찰사가 입성하였다. 이튿날인 이십일에 체찰사 이 원익(李元翼)은 순신이 이 고을에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군관 이 지각(李知覺)을 보내어 문안하고 얼마 있다가 또 군관을 보내어 조상하였다.
『당고하였단 말을 인제야 듣고 놀랐소. 슬픈 말씀은 물을 말이 없소.』
하고 전갈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해만지거든 곧 가 뵙는다 여쭈오.』
하고 순신은 군관에게 말하였다.
해가 진 뒤에 순신은 동헌에 체찰사를 찾았다. 체찰사는 상중인 순신에게 경의를 하여 체찰사는 순신을 대해 국사를 근심하는 의논을 하였다. 순신은 자기가 죄인이므로 다만 듣고만 앉아 있었다.
이십 삼일에 이 체찰사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순신을 불렀다. 이날 원익은 순신을 향하여 비분한 어조로 국사가 날로 그릇됨을 개탄하고 다만 죽는 날을 기다릴 뿐이라고까지 말하고 양인이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순신은 이튿날은 초경도 원수진으로 간다는 말을 고하여 작별 인사를 하였다.

35

이튿날 아침 이 순신이 구례를 떠나려 할 때에 체찰사는 군관 이 지각을 보내어 안부를(李知覺) 묻고 또 양식하라고 쌀 두 섬을 보내며 경상 우도 연해의 지도를 하나 그려 보내라고 하였다. 순신도 지도를 가진 것이 없으나 그려 보내었다.
그러다가 그날은 비가 와서 못 떠나고. 이튿날도 비가 그치지 아니하여 못 떠나고. 또 그 이튿날인 이십 육일에도 비가 종일 퍼부었으나 이날은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 사량 만호(蛇梁萬戶)변 익성(邊翼星)이순신을 보려고 배를 타고 찾아 왔으나 길 떠날 때라 잠깐 상면하고 말도 못하였다.
석주관(石柱關)에 이르니 비가 퍼붓고 길이 미끄러워서 일행이 넘어지고 자빠지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 아들 열(열) 은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순신을 부축하였다. 저물어서 악양(岳陽) 이 정란(李廷鸞)의 집에 당더하니 문을 닫고 일행을 거절하였다. 김덕령(金德齡)의 아우 덕린(德麟)이가 먼저 들었다는 핑계였다. 열이 주인을 불러 강청하여 겨우 방 하나를 얻어 들었다. 일행의 행장은 물에 넣었던 것같이 젖었다.
이십 칠일에 팟퇴(팟퇴). 이십 팔구일에 하동(河東)에 들려 유월 초일일에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청주역(淸水繹)을 지나 저물게 단성(丹城)땅 박 호원(朴好元)이라는 사람의 머슴의 집에 드니 주인은 이 순신이라는 말을 듣고 흔연히 맞아 안방을 내어 주었으나 방은 좁고 물 것은 많아서 한잠을 못 이루고 밤을 새웠다.
다시 사흘을 걸어 유월 초오일에 초계(초계)에 이르러 어떤 주막에 들었으나 이튿날 그 주인이 과부란 말을 듣고 곧 다른 집으로 떠났다.
초팔일에도원수 권율이 남원(南原)으로부터 돌아 왔다. 그는 명장 양호(楊鎬)를 맞으러 갔던 것이다.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다시 조선을 침범한다 하여 조정에서는 다시 명나라에 청병하여 양호라는 사람을 경략사(經락使)로 보낸 것이었다.
순신이 원수를 찾으니 원수는 순신을 반갑게 맞았다. 시국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한 끝에 권 원수는 박성(朴惺)의 상장초(上章草)를 순신에게 보였다.
박성의 상정에는 권 원수의 처사가 너무 소탈한 것을 많이 말하였으므로 원수는 스스로 편안치 못하여 체찰사 이원익에게 상서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순신은 권 율의 진에서 사처에 돌아 와서 마음이 불평하여 저녁밥을 폐하였다.
십 일일에 순신의 아들 열이 곽란을 일으켜 밤새도록 고통 하였다. 순신은 손소 아들의 손발을 더운 물로 씻고 약을 달이고 하느라고 밤을 새웠다.
십 이일에 행주싸움에 이름낸 승장 처영(處英)이 부채 한 자루와 짚신 한 죽을 가지고 와서 순신을. 보았다. 순신은 다른 물건으로써 그것을 갚았다.
이날 부산에 있는 적병이 창원(昌原)으로 향하고. 서생포(西生浦)에 있는 적병은 경주(經州)를 치려 한다는 고목이 왔다. 하여 원수는 중군장에게 군사를 주어 전선에 내보내었다.
십 칠일에 순신이 원수를 찾았더니. 이날 원수는 순신을 향하여 통제사 원균(元均)이 마음이 바르지 못하여 항산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통분히 여긴다 하고. 그 예로 비변사(備邊司)의 계를 보였다. 그 내영은 이러하였다.
「원균(元均)의 장계 내에 수륙으로 함께 나아가먼저 안골포(安骨浦)의 적을 친후에야 주사가 부산(釜山)에 들어 갈 것이니 먼저 육군을 보내어 안골포의 적을 치게 하소서.」권 원수는 이에 대한 장계에 이러한 말을 하였다 -
( )
(통제사 원균이 나아가 싸우기를 원치 아니하오며. 아직 안골포를 먼저 쳐야 한다는 것으로 핑계를 삼사오며. 주사제장이 많이 의심을 두건마는 원균은 안에만 있고 밖에 나오지 아니하오며. 한번도 제장으로 더불어 의논하는 일이 없사오니 일을 그릇할 것을 알리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