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 14 (16~20)

16

이때에 명나라의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심유경(沈惟敬)의 진언을 믿어 일본 외교를 개시하기로 결심하였다.
위에도 말하였거니와. 풍신수길(풍신수길)은 나이도 많고 조선과 명나라의 사정에도 어둡고 하여 기어코 조선과 명나라를 때려 이기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지마는. 부하 장졸은 대개 싸움을 원치 아니하고 어서 본국으로 돌아 가기를 바랐다.그들은 싸워서 아무 소득이 없고 공연히 인명만 상하는 것임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그래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 덕형(李德灐)을 통하여 가끔 조선의 조정에 화의를 청한 것이었다.
오직 가등청정(加藤淸正)만은 풍신수길의 뜻을 받들려 하였으나 그의 세력은 소서행장은 및 지 못하였다. 이보다 먼저 심유경(沈惟敬)은 서서 비탄수(小西飛彈守)라는 일본 자웃를 청화사로 제리고 북경에 가서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통하여 명 나라 조정에 일본의 강화 조건으로.
첫째. 풍신수길을 왕으로 봉할 것.
둘재. 해마다 조공하기를 허할 것을 제출하였다. 이른바 봉. 공(封. 貢) 두 조건이었다. 일본측의 제출 조건에 대하여 명 나라 조정에서는 응징설(膺懲設)과 허화설(許和說)이 분분하였으나 명 나라 역시 끊임없는 내란에 국력은 피페하여 도저히 전쟁을 계속하기가 어려울 뿐더러. 벽제관 싸움의 큰 패전에 일본군의 무서운 맛을 보아 도리어 화의를 들어 큰 패전에 일본군이 무서운 맛을 보아 도리어화의를 들어 주는 것이 후환이 없으리라는 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봉은 상관 없지마는. 공은 불가하다는 설이 유력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풍신수길을 왕으로 봉하는 것은 별로 명나라에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공을 허락해 해마다 일본 관민이 명 나라 구경에 출입하는 것은 백해가 있고 일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명 나라 조정의 의견은「( ) (봉은 허해도 공은 허치 아니한다)」으로 결정이 되었다.
그래서 명나라에서 책봉정사(冊封正使)로 이 종성(李宗誠). 부사로 양 방형(楊方亨)을 일본으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심유경은 석성에게서 많은 기밀비(일본 군인 요인을 매구한다는)를 받아 가지고 종성. 방형. 정부 양사를 따라. 따른다는 것보다도 차라리 데리고 조선으로 향하여 을미년 사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 종성 등은 책보(冊寶)와 백을 가지고 풍신수길(豊臣秀吉)로써 일본 왕을 봉하러 가는 길이라 하여 서울에 머물러 일본군이 조선 지경에서 전부 철퇴하기를 기다려서야 떠난다고 일컫고. 날로 부산. 울산 등지에 있는 일본군에게 속히 철퇴하기를 교섭하였다.
이 종성은 개구리를 좋아하여 전라도 남원에 내려 와 앉아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개구리를 잡아 들이게 하며 날로 소를 잡아 새 술을 명하고 새 계집을 들이라 하여 그 폐단이 여간이 아니었다. 천사라고 하니 그의 위엄은. 무서웠다.
그를 따르는 장졸뿐 아니라 조선 지경에 있는 명 나라 장졸들은 거의 다 한 둘의 조선 여자를 처첩으로 삼았다. 누구의 딸이든지 명 나라 장졸의 눈에 들기가 무섭게 빼앗기고 말았다. 처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내도 그러하였다.
그래서 젊고 아름다운 여자로서 명병에게 가기를 싫어하는 이는 길에 명병을 만나면 일부러 한쪽 눈을 감아 애꾸가되거나. 한 다리를 절어 절름발이가 되거나. 입을 한편으로 찌그려 얼굴을 보기 흉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종성. 양 방형 등은 이 모양으로 호강만 하고 있는 동안에 편지를 가진 사자만 부산으로 오르락내리락하나 일본 군사는 철퇴할 기미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17

마침내 심유경(沈惟敬)이 몸소 부산으로 가기로 하였다. 조선에서는 황신(黃愼)으로 하여금 심유경의 접반(接伴)을 삼았다. 그리고 책봉정사 이 종성(李宗城)과 책봉 부사 양 방형(楊方亨)과의 접반사로는 이조 판서 이 항복(李恒福)과 호조 판서 김수(金수)가 임명되었다 독자도 기억하시려니와. 이 항복은 명나라에 내부(內附)하기를 주장하던 도승지었고. 김 수는 난리 초에 경상 감사로서 달아난 사람. 뒤에는 이 순신과 부산 협격을 약속하고도 피신한 사람이었다.
황신은 심유경을 따라 부산에 이르러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진에 들어갔다.
소서행장은 황신이 자리에 앉기를 거절하였다. 황신은 성을 내어 밖으로 뛰어 나왔다 행장은. 천관(天官)에게 실경이 될까 보아 그러한 것이라 하여 그 잘못됨을 사하고 다시 황신을 불러들여 앉히고.
『조선도 이러한 기개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버티어 가는 것이요.』
하고 위로하였다.
황신이 앉은 자리에서 심유경이 소서행장에게 요구하는 것은 일본군이 전부 철퇴하여야 책봉사가 부산에 온다는 것이었다. 황신이 없는 곳에서는 심.
소서 두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였는지 알 수 없었거니와. 아무려나. 소서행장은 심유경을 진중에 머무르고 자기만「나고야」에가서 수길(秀吉)을 보고 명령을 들어 가지고 온다하여 배로 부산을 떠나서 일본으로 향하였다.
이 모양으로 명 나라와 일본과의 사이에 지리한 외교적 절중(계사. 갑오. 을미.
병진 사 년)이 있는 동안에 조정에서는 주전. 주화 양파가 갈리어 동서 당쟁을 겸하여 싸우기에 끝이 없었다.
주화론자로 먼저 발언한 것은 전라 감사 이정엄(李廷嚴)이었다. 이 정엄은 연안부(延安府)를 지키기에 공이 있던 사람이다. 그는 지금 국세가 피폐하고인민이 이산하였으니 잠시 화의를 들어 월왕 구천(越王 句踐)의 십년 생취. 십년 교훈(十年生聚. 十年敎訓)하고 아신상담(臥薪嘗膽)하던 것을 본받아 실력을 양성한 뒤에 한번 싸워보자는 것이었다.
이 정엄의 의견에 대하여 주전의 여론이 벌떼같이 일어나 대간은 정엄을 죽이기 가하다고 극언하였다. 이것이 갑오녀 오월 일이었다.
그달 이십 육일에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이 왕에 부름을 받아 일구렇할 때에 좌찬성(左贊成) 성혼(成渾)을 대동하였다. 대개 원래 주전론자이던 류성룡은 명나라를 믿을수 없음과. 인민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어서 조석을 난 보이니. 명 나라로 하여금 외교책으로 미봉지계를 삼아 적의 형세를 늦추고 안으로 국방을 힘써서 서서히 도모하자는 의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마침 성혼(成渾)이 성룡과 뜻이 같으므로 그를 데리고 일궐한 것이었다.
왕이 성혼을 보고 주전. 주화에 대한 의견을 하문하매 성혼은.
『지금 국세가 위기 일발이오니 잠시 싸움을 쉬고 자강을 도모함이 옳은가 하오. 우리나라가 이미 능히 싸우지 못하고 도리어 명나라의 강화책을 반대한다는 것은 옳지 아니한가 하오.』하였다.
왕은 성혼의 말을 못마땅히 여겨서 대답이 없었다.
이때에 마침 위에 말한 이 정엄의 주화 장계가 올랐다. 성혼의 말에 대하여서는 감히 입을 벌리지 못하던 무리들이 정 엄의 장계가 오르매 벌떼같이 일어나.
『정 엄은 베어야 하오.』
하고 들끓었다.

18

성혼은 조정이 모두 정엄을 베라는 것을 보고 왕께 아뢰었다 -.
정 엄은 본래 충신 『 대절이 있는 사람이니 이 사람을 깊이 허물할 바를 아닌가 하오. 복절사의(伏節死義)할 마음이 없고야 이러한 말을 낼 수가 있소?』
하고 정 엄을 변호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은 크게 노하여 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수와 화친을 말하는 자는 죽으이 마땅하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류 성룡은 감히 말을 내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이로부터 삼사(三司)가 다투어 주화론 배척을 주장하였다. 유영경(柳永慶)이 그 두목이었다.
성룡은 뒤에 영경을 보고.
『영감이 그렇게 싸움을 주장하니. 싸울 힘이 있소?』하고 물었다.
영경은 대답할 말이 없이 무안하였으나.
『대감은 주화오국(主和誤國)이라고 하시던 말을 잊었소?』
하고 반문하였다.
성혼이 물러난 뒤에 왕은「 ( ....) (한번 죽기는 차마 할지언정 화친을 구한단 말을 듣기를 원치 아니 하노라. 어쩌나 사특한 말을 들려 의를 깨뜨리고 삼군의 마음을 혹하고).」하는 글을 지어 조당(朝堂)에 방을 붙이게 하고 인해 전교를 내리되.「간사한 놈이 사특한 말이 이에 이를 법이 있는가. 무릇 호정의 처지와 변장의 소위. 기다 혼의 사특한 말에 그르침이 됨이로다」하였다. 이리하여 성룡과 혹은 곧 사직하고 대죄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조선 조정에서는 주전론과 주화론으로 싸우고 있는 동안에 그런 것은 알은체할 것도 없이 명나라와 풍신수길과의 새에는 화의가 진척되었다.
처음에는 명나라 책봉정사가 부산의 일본 진중에 오기 전에는 철병할 수 없다고 소서행장이 주장하기 때문에 남원에서 개구리 잡아먹기로 일을 삼던 이 종성(李宗誠)은 을미년 시월에 마침내 부산으로 내려 가 소서행장의 진중에 들었다.
그러나 소서행장은 관백 풍신수길의 명이 없이는 촐병 여부를 단언할 수 없다고 하여 이 종성을 만나지도 아니하고. 먼저 가서 책봉사를 맞을 준비를 하고 또 책봉을 받을 예법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 하여 병신년 정월에 소서행장은 심유경과 같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심유경은 이번에 자기가 일본에 가서 수길을 만나기만 하면 만사는 다 해결만 하면 만사는 다 해결된다고 장담하고. 문관의 옷을 입고 의기 양양하게 배에 올랐다. 배에는「 」 넉 자를 쓴 큰 기를 달았다. 이것은 자기의 혀의 힘으로 족히 두 나라의 싸움을 말리겠다는 뜻이다.
심유경은 풍신수길에게 망룡의 (망룡의)와 옥대(玉帶)와 익선관(翼善冠)과 대명 지도와 무경칠서(武經七書)를 자기 개인의 이름으로 풍신수길에게 드려 그 환심을 사고. 또 석성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보물과 금. 은을 풍신수길의 부하 여러 요인에게 뇌물을 보내어. 책봉정부 사보다도 자기가 중요 인물인 것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리 마망의. 일본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재미있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심유경이 일본에 건너가 이렇게 풍신수길이하 요인들의 환심을 사며 향락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 부산에 남아 있는 책 봉정사 이종성은 겁이 더럭 났다.
그것은 책봉준비하러 간다던 심유경과 소서행장에게서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망연할뿐더러 자기만 부산에 내려오면 철퇴한다던 일본 군대는 조금도 물러가는 빛을 보이지 아니한 때문이었다.

19

심유경이 일본으로 간 후에 수삭이 되어도 소식이 없으므로 심히 초조하던 책봉정사 이 종성(이종성)은 병신 사월 어느 날 무서운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명국 복건(福建) 사람으로 왜구에게 포로가 되어 오래 일본에 있다가 도망하여 온다는 두 사람의 말이었다. 그 말은 이러하다 -.
풍신수길은 결코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 아니하리라. 이 종성이 만일 바다를 건너 가서 일본 땅을 밟는 날이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먼저 건너간 심유경도 지금 감금을 당하고 있어서 벌써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종성은 결코 일본을 가지 말아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심유경이가 이 종성을 미워하여(이종성이 개국 공신 李文忠의 자손으로 문벌이 심히 높기 때문에 매양 심유경을 일개 부랑자. 협잡군이라고 조인 광좌에 꾸짖은 까닭이었다) 그를 일본에 건너 오지 못하게 하려는 꾀였었다.
이 꾀를 모르는 이 종성은 그날 밤으로 군도 모양으로 변복하고 급한 시부름을 가노라 하여 파수 보는 일본 군사를 속이고 사관에서 빠져 나와 밤새도록 남원(南原)을 향하고 도망하노란 것이 새벽이 되어 보니 울산(蔚山)의 일본성이었다. 그는 황겁하여 산으로 들어 가 사흘 동안을 밥을 굶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조선 사람에게 발견도어 서울로 올라와 북경으로 달아나 버렸다.
아침에 책봉 정사 이 종성이 달아난 것이 발각되자 일본 사졸들은 가슴을 치고 울었다 그는 그들은 소서.. 행장이 일본을 다녀 와서 책봉사를 데리고 가는 날이면 자기네도 조선 땅에서 철퇴하여 하루라도 바삐 그리운 고국에 처자를 만나리라 하고 그것만 고대하다가 이제 책봉사가 달아나고 보니 전쟁이 끝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낙심한 까닭이었다.
부사 양 방형(楊方亨)은 늦잠을 자다가 이 종성이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곧 이 종성의 사관에 달려 가 방을 수색하였다. 책봉사의 인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곧 그 인을 들고 소란하는 일본 강졸들을 향하여. 여기 책봉사의 인이 있고 또 부사인 내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효유하였다. 그리고 남아 있는 명나라 관리와 군사를 불러 놓고 달아난 이종성이 명나라의 이름을 더럽히는 놈이라고 타마하였다. 양 방형의 말에 일본 군사들은 진정하였다.
이 종성이 달아난 후 며칠이 아니 되어서 소서행장이 일본으로부터 돌아 왔다. 명 나라에서는 이 종성이 도망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부사 양 방형으로 정사를 삼고 심유경으로 부사를 삼아 일본으로 가게 하였다. 그때에 심유경은 조선 조정에 대하여 일본에 통호사를 보낼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원래 화의를 원치 않음으로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마침내 부득이 사신을 보내게 되어 심유경의 접반관이던 황신(黃愼)을 정사로 명나라 책봉사와 동행케 하였다.
병신년 이월 이일. 대판(大阪)에서 풍신수길 일본 왕 책봉식(豊臣秀吉日本王冊封式)이 거행되었다. 이보다 먼저 풍신수길은 복견성(伏見城)에 굉장하고 화려한 궁전을 조영하여 명 나라 책봉사를 거기서 맞아서 위엄을 자랑하려 하였으나 불의에 대지진이 일어나 모처럼 지은 궁궐이 다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풍신수길은 지진에 무너져도 겁나지 아니할 만한.
헛가게 모양으로 짐을 짓고 책봉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날 명나라 책봉정사 양 방형(楊方亨)이 앞에서고 부사 심유경(沈惟敬)이 금인(금으로 새긴 인)을 들고 뒤를 따르고. 풍신수길 측으로는 덕천가강(德川家康). 가등청정(加藤淸正). 소서행장(小西行長) 등 각 제후가 열립하였다.

20

식이 시작되매 풍신수길이 누른 장막을 열고 지팡이를 잡고 청의동자 둘을 뒤에 세우고 식장에 나왔다. 그는 무릎이 습으로 아프다 하여 지팡이를 짚은 것이었다. 수길이 나오며 시위가 무슨 호령을 하니 모인 사람들이 다 송구하여 엎드렸다 이 소리에 책봉. 부사 심유경도 엎드리고 정사 양방형도 엎드려 버렸다. 그들은 자기네를 어찌하지나 않는가 하고 겁을 집어 먹은 것이다. 풍신수길은 명나라 사신이란 것이 이처럼 자기 앞에 굴복하는 것을 보고 픽 웃고.
『이리 오르라 하여리!』
하고. 마치 아랫 나라 사신이나 불러올리는 것처럼 명령을 하였다.
소서행장(小西行長)은 황망하게 풍신수길의 곁으로 가서.
『천소(天朝)에서 온 사신은 우대해야 하오.』
하고 아뢰었다.
이에 심유경은 일어나 풍신수길의 앞에 이르러 명 나라 황제가 하사하는 금인과 왕으로 봉하는 관복을 드리고 또 수길의 신하 되는 사람 오십여 명의 관복을 드리고 또 수길의 신하 되는 사람 오십여 명의 관복을 드리고 또 수길의 신하 되는 사람 오십여 명 관복을 드렸다.
애초에 명나라에서는 신하의 관복은 삼십 벌 밖에 장만하지 아니하엿다가. 그 뒤 일본에 와 본즉 아무리 하여도 오십 벌은 되어야 하겠으므로 급자스럽게 여관에서 만들고. 그리고도 부족하여 양방형과 심유경의 입던 옷까지 벗어서 보충한 것이었다.
금인과 관복을 드리고 나서는 양 방형이 책봉문을 낭독하였다.
명 나라 황제의 책봉문을 읽는다 하여 풍신수길더러 엎디기를 청하였으나 수길은.
『나는 습으로 무릎이 아파서 꿇지는 못한다.』
하고. 다만 허리만 굽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굴복하였다. 수길은 책봉문이 낭독되는 중에도 가끔 고개를 들어 명나라 사신도 바라보고 다른 데도 바라보고, 더구나 양방형의 떨리는 목소리와 전에 들어 보지 못하던 명나라 발음이 우스워서 킥킥 웃기도 하였다. 물론 무슨 소리를 읽는지 그는 한마디도 알아 들을 리가 없었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
『( )』
( )
이 책봉서는 김에 쌌는데 청 . 황 . 적.백.흑. 오색 무늬가 있는 바탕에 구름과 학의 모양을 짜내인 것으로. 길이다 십 팔척 칠촌. 넓이가 일척 사푼이요. 연월일 밑에는 사방 네 치 서 푼 되는 「 」라는 인을. 또 그 다음에는 부(符)가 찍혔다. 이튿날 풍신수길은 명나라에서 내린 일본 왕의 장복을 입고 익선관을 쓰고 그 부하 제장들도 각각 품계를 따라서 명나라에서 내린 관복을 입고.
책봉사 일행을 주빈으로 하여 대연을 배설하였다. 음식상도 명나라 예법을 따라 고가 삼척이요. 방이 오척이요. 소고기. 닭고기. 생선을 담고. 금. 은으로 아로새기고 꽃무늬를 놓고 「사루 라꾸( )」나는 음악을 하고 - 이날 밤에 풍신수길은 태장로(兌長老). 삼장로(三長老). 철장로(哲長老) 등을 불러서 명나라 황제가 보낸 책봉문을 새겨 들이라 하였다.
「너로 일본 왕을 봉하노니」하는 구절에 이르러 수길은.
『미친놈. 제가 나를 봉하는 건 다 무에야?』
하고 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