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 11 (01~05)

1

왕이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한 뒤에 소서행장(小西行長)은 평양에 웅거하여 군사를 쉬며 일본 수군이 이 순신의 수군을 깨뜨리고 평안도 바다로 들어오기를 고대하였다.그리하여서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의주를 엄습하여 조선 왕을 사로 잡고 완전히 조선을 손에 넣으려 한 것이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원정군이 육전에 연승하는 보고를 듣고 만족하였으나 그와 반대로 수전에서 연패하는 보고를 듣고는 심히 노하고 화를 내었다. 조선의 제해권을 잡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군사를 끌고 명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풍신수길은 협판안치(脇坂安治)로 주장을 삼고 협판 좌위문(脇坂左衛門) . 도변칠우위문(칠遇위문)으로 아장을 삼아 새로 일대 합대를 조직하여 기어코 이순신의 함대르 섬멸할 것을 명하였다. 이번 수군으로 말하면 조선의 바다를 지배하기 위함보다도 이 순신에게 대한 원수를 갚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었다. 수군이 연전 연패한 것은 일본 민심에도 극도의 불안을 주었고. 따라서 새로 일본 전토를 지배하는 자리에 오른 풍 태합(豊太閤 - 태합이란 벼슬을 붙여서 풍신수길을 부르는 이름)의 융륭하던 위신이 깜임도 적지 아니하였다.
일본으로부터 새로 대 수군이 부산에 건너 왔다는 정보가 전라 좌수영에 도달한 것은 유월 말이었다. 이 순신은 반드시 이런 일이 있을 줄을 짐작하였던 터이라 곧 전라 좌도의 각관. 각진의 수군에 강구대변(江口待變) - 오늘날 말로 대기(待機)하라는 영을 내리고 일변 수로와 육로와 아울러 사자를 보내어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이억기(李億祺)와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 원균(元均)에게 이관(李關)하여 칠월 칠일을 기약하여 노량진(노량진)에 모여 제 삼차로 적의 수군을 칠 것을 약속하였다.
칠월 칠일을 기다리는 동안에. 혹은 가덕(가덕)에 전선 십여 척이 나왔다 하고 혹은 거제(巨濟) 근해에 적선 삼십여 척이 떴다는 정보가 답지할 뿐 아니라.
금산포(錦山浦- 남해의 남단)에까지 출몰하는 것을 바로 좌수영의 탐보선이 발견하게 되었다.
이 순신은 왕이 서울을 떠난 것. 임진강에 패한 것까지 들었고 평양을 지키리라는 소문까지도 들었다. 그러나 평양을 버린 것이라든지 왕이 의주로 쫓겨 가서 압록강 건너편에서 명 나라 군사의 구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앉았다는 기별까지는 아직 듣지 못하였다. 종묘 사직의 위패도 잊어 버리고 도망하는 판에 일개 변방 작은 장수인 이 순신에게까지 그러한 기별을 할 정신이 조정에는 없었고. 또 설사 할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할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이 순신은 이러한 패보를 들을 때마다 서향히여 통곡하였다. 이렇게도 조선에 사람이 없는가. 이렇게도 조선사람은 못난 백성인가를 한탄하였다. 그는 어떤 때에는 술이 취하여 홀로 비분을 잊으려 하였다.
조선 칠도가 다 적병의 손에 들어 가고 온전하게 남은 것은 오직 전라도 하나뿐이다. 이 전라도 하나마저 적의 손에 들어 가면 조선의 강토는 한 치도 못하는 셈이다. 이에 순신은 결심하였다. 죽기로써 전라도를 지키고 적의 수군이 전라도 앞바다를 지나지 못하게 하자고.
『순신이 죽지 아니하고 적병의 발이 한걸음도 전라도에 들지 못하리라.』
하고. 칼을 짚고 하늘에 맹세하였다.
이런 때에 일본의 새 수군이 경상도 바다를 횡행한 것이었다. 팔도 강산에 살아 있는 이 순신 하나뿐이었다. 강산이 오직 그 하나를 믿은 것이다.

2

임진 칠월 초육일 아침에 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합하여 대소 전선 팔십여 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떠나 노량진(鷺梁津)으로 향하였다.
당포(唐浦)승전으로 제 이차로 적의 수군이 천성(天城). 가덕(加德)이서에 그림자도 없이 만들고 유월 십 일에 파진하고 돌아 온 때로부터 거의 한 달이다.
그동안에 순신은 군사를 교련하고 배를 수리하고 군기를 준비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이 동안에 정히 용인(龍仁). 경성(京城) . 임진(臨津)에서 조선군이 연전 연패 - 라기 보다는 부전 자패하고.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 도원수 김명원(金命元)등이 달아나기 경쟁을 하며 왕과 그의 종신들은 또 싸우며 또 달아나는 동안이었다(여기 싸운다는 것은 적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동인.
서인의 당파 싸움을 한다는 것이었다).
전국의 힘이 다 무너지고 왕과 그의 신하들이 모두 혼비백산하여 오직 다른 나라(명 나라)에 백배 천배로 구원을 애걸하고 있을 때에 아랫녘 한 구석의 미관말직을 가진 일개 수사 이순신이 홀로 삼천리 조국을 두 어깨에 메고 조정에서는 알아 주지도 않는 싸움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순신은 뱃머리에 서서 구름 속에 표묘하게 보이는 지리산(智理山).
백운산(白雲山)등 하늘에 닿은 웅장한 자태를 바라보며 이 아름답고 웅장한 강산에 주인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실로 일국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지기에는 순신은 너무도 하잘 것이 없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오직 하늘에 너무 나라를 위하는 충성. 목숨보다 자기의 맡은 사명을 더 중히 여기는 책임감.
하늘이 무너져 덮더라도 까딱 없는 용기 - 이것이 순신으로 하여금이 길을 떠나게 한 것이었다.
노량진에는 경상 우도 수사 원균(元均)이 헌 배 일곱 척을 수리하여 영솔하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순신은 원균과 이억기를 배로 불러 올려 이번에 싸울 방략을 재삼 약속하였다. 그 약속의 요지는. 전라 좌도. 전라 우도. 경상 우도의 삼도 연합군이 절대로 통일한 행동을 할 것. 부질 없이 공을 다투지 말고. 또 저을 깔보지 말고 가장 신중히 명령에 의하여서만 행동할 것 등이었다.
이름 난이라도 삼도 연합군인데다가 순신이나 억기나 원균이나 다 평등된 일개 수사에 지나지 못k니 명령이 통일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오직 과거에 두 차례나 연합 행동을 한 경험이 있는 것과. 수군의 세력으로 보아 순신의 것이 다른 두 세력보다 압도적으로 큰 것과. 이 억기가 평소에 순신을 흠모하여 달게 그 절제를 받은 것으로 이삼도 연합군이 통일될 가능성이 있는 것뿐이었다.
약속이 끝난 뒤에 순신이.
『지금 성상이 몽진하시와 조명을 기다릴 수가 없고. 그렇다고 군중에는 일시도 대장이 없을 수 없으니 우리 세 사람이 다 직품이 상등하여 막상막하 하지마는 불가불가 한 사람으로 대장을 삼을 수밖에 없소.』
하고 좌중에 발의하였다. 이억기가 서슴치 않고.
『그것을 물을 것 없이 영감이 대장이 되시어야겠소.』
하고 순신을 천하였다. 원균은 속으로 미상불 앙앙하였으나.
『그렇기를 두말이요. 좌수사 영감이 우리 중에 연치로 해도 두이시니 대장이 되시오.』
하고. 연치라는 조건으로 순신이 사령 장관 되는 것을 승낙하였다.
『제공이 그리하신다면 사양 아니 하겠소.』
하고 순신은.
『그러면 이로부터 제공은 내 절제를 받을 것을 맹세하시오.』
하고 칼을 빼어 높이 드니. 이억기와 원균은 칼을 뉘여 두 손으로 받들어 절제에 복종할 것을 맹세하였다.

3

노량에서 약속을 정한 삼도 연합군은 일체 이 순신의 절제를 받기로 서약하고 제장이 주장선에 모여 잔을 잡아 하늘에 축원하고 맹약한 후에 곧 전함대가 속양의 노량진을 떠나 창신도(昌信島 - 一名 昌善島) 앞바다에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칠월 칠일에는 검은 구름이 하늘에 덮고 동풍이 세게 불어 파고다 산과 같은 것도 무릎쓰고 순신은 전군에 명령하여 배를 저었으나 고성 땅 당포(唐浦)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다. 당포는 당포의 대승전을 하던 곳이라.
장수들이나 군졸들이 모두 한 달전의 장쾌하던 일을 생각하고 저절로 가슴이 뛰는 것을 깨당았다. 함대를 당포 앞바다에 세우고 종선을 놓아 밥 지을 나무와 물을 얻으로 물에 나갔더니 산에 올랐던 피란민들이 우리 함대가 오는 것을 보고 마치 오래 떠났던 부모를 만난 듯이 반겨 내려 와 손을 두르고 소리를 질러 기쁜 뜻을 표하였다. 피란인 중에서 김천손(金千孫)이라는 소 치는 사람이 황망히 물 길러 간 배에 싣고 순신에게로 와서 그 연유를 아뢰이니 순신이 천손의 말은 이러하였다.
『소인이 오늘 볼일이 있어 거제에 갔더니 적선이 대선. 중선. 소선 합하여 칠십여 척이 미시쯤 하여 영등포(永登浦) 앞바다에 나타났다가 고성(固城) 땅 견내 도(見乃도)에 와 닻을 주었소.』
김 천소의 보고는 군사상으로 보아서 진실로 중대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지금까지 적군의 소재를 분명히 모르고 어디든지 찾아 가서 만날 생각을 가지고 행선하였지마는. 김천손의 보고로 말미암아 적의 소재와 적선의 수효를 분명히 안 것은 마치 힘을 새로 얻음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 이에 순신은 밤으로 적군의 장수들을 장선에 모아 크게 순사 회의를 열고 밝은 날에 견 내도에 있는 칠십여 척 적선을 싸웟 깨뜨릴 의논을 한 후에 각각 부서를 정하여 먼저 갈자와 뒤에 지킬 자를 분명이 정하고 방포로써 군호를 하되 그 군호에 응하여 어떻게 행동할 것을 낱낱이 명령하였다. 그리고 또 한번.
첫째. 결코 제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오직 약속한 보와 그때그때의 명령에 복종할 것.
둘째. 결코 먼저 한다는 공을 다투지 말고 각각 제 맡은 직분을 다할 것.
셋째. 애써 적병의 머리를 많이 베이려 하지 말고 많이 죽이기만 힘쓸 것.
등을 훈시하였다. 이 섹째 것은 전공을 자랑하기 위하여 목을 베이기만 위주하는 폐풍이 있음을 경계한 것이니 순신은 싸울 때마다 비록 수급을 증거로 보이지 아니하더라도 누가 잘 싸우고 힘써 싸운 것을 보아서 아는 것이니 머리 하나 베이는 동안에 적병들을 죽이라는 훈시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적선을 잡아 거기서 빼앗은 재물은 국가에 바칠 것(군기나 무슨 기록이나)을 제하고는 다 적선을 잡은 사람이 나누어 가질 것을 성명하였다.
새벽에 순신은 군사들에게 밥과 고기를 만히 먹이고 또 낮에 먹을 것을 넉넉히 주되 비록 장수라도 술을 먹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칠월 팔일 아침은 어제와 반대로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동편 하늘에 붉은 기운이 돌기도 전에. 아직도 굵은 별들이 선잠을 깬 듯이 깜박거릴 때에 순신은 영을 내려 전함대 대소 팔십여 척이 일제히 닻을 감고 돛을 달게 하였다.
깊이를 모르는 검은 물이 닻줄에 흔들려 늠실늠실 춤을 추었다.

4

순신의대함대가 새벽의 물을 헤치고 한산도 앞바다에 다다랐을 때에는 소쿠리도 위로 붉은 해가 솟아 올라서 팔십여 척이 전선의 돛에는 일시에 불이 붙은 듯하였다. 그러나 함대가 견 내 도를 바라볼 때에는 순식간에 팔십여 척 전선이 그림자를 감추고 오직 판목선 육척이 고단하게 북으로 견 내 도를 향하여 미끄러질 뿐이었다. 다른 배들은 순신의 명령대로 정한 부서를 따라 각각 산 그늘과 섬 그늘에 숨고 순신은 주력 함대 오십여 척을 한산도 대석 뒤 포구에 숨기고 자기만 이삼척 배를 거느리고 마치 선유하는 사람 모양으로 앞바다로 오르락 내리락 하였다.
해가 올라오자 마치 햇발을 따라 온 듯이 바람이 불기를 시작하였다. 아직 그리 큰 바람은 아니나 장차 큰 놀로 변할 듯한 살기를 띤 바람이었다. 이 바람을 따라 거울과 같은 한산도 바다에는 가는 물결이 지기를 지작 하고 보리밥 한솥 지을 때 한때를 지나서는 꿈틀꿈틀 굵은 물렬이 일어났다.
광양 현감 어영담(漁泳潭)이 거느린 선봉대는 적함이 정박하여 있다는 견 내 도를 향하여 살같이 달렸다. 때마침 어지간히 세게 부는 서남풍에 돛이 찢어질 듯이 바람을 품었다. 거제도의 산들이 줄달음하듯이 오른손 편으로 달아났다.
한산도 앞에서 하회를 기다리는 수신은 뱃머리에 나서서 북으로 견 내 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이 반 넘어 썰도록 어영담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을 보고 순신은 적에 마음이 초초하였다. 순신의 계획은 썰물에 적함을 한산도 바다로 끌어 넣어 싸우는 동안 저녁 밀물을 맞아 적으로 하여금 의 양으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결코 견 내 도에서는 적함과 싸우지 말고 만일 적이 따르거든 달아나 돌아 오라고 일렀지마는 혹시나 솟아 오르는 기운을 억제하기가 어려워 싸우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근심하였다.
어젯밤 군사회의를 할 때로부터 견 내 도로 따라 가서 싸우기를 주장하던 원균은 순신의 계교를 비웃었다. 병목같은 견 내도 좁은 목에 몰아 넣고 싸우지 아니하고 호호한 것이다. 날이 늦도록 선봉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원균은 자기의 선견지명을 자랑하여 순신에게.
『지금이라도 견 내 도로 따라 갑시다. 그까짓 적이 무엇이 무서워서 못 간단 말이요.』
『전선 오십 척만 소장을 빌려 주시면 해지기 전에 그 놈들을 깡그리 잡아 오리다.』
하고 빈정대었다. 그는 마치 영등포에서 싸우지도 않고 그 많은 전선과 군기와 수군을 버리고 도망한 것은 자기가 아니요. 딴 사람인 것 같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순신은 말 없이 머리를 흔들어 원균의 말이 옳지 아니한다는 뜻을 표하였다.
견내 도와 같이 풀과 암초가 많은 곳은 지키기에 편하나 치기에 맞지 못함과 또 설사 견 내도에서 싸워서 적이 진다 하더라도 적은 배를 버리고 물으로 올라가 달아날 것이니 결국 싸워 이긴다 하더라도 적병에 인명의 손해는 적을 것이요. 또 이편의 전선도 혹은 풀에 올라 앉고 혹은 암초에 부딪쳐 손해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여도 원균은 잘 듣지 아니하였다.
이윽고 견 내 도로부터 달려 오는 배가 보였다. 주먹만 하다가 사람만 하여지고 마침 썰물을 타서 삽시간ㅇ 그것이 어영담이 거느린 배인 것이 판명되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고 다 있었다.
은은히 포성이 들이는 것은 일변 싸우며 일변 달아나는 것을 표함이었다.
아니다 다를까. 조선배들의 뒤를 따라 마치 수효를 모를 듯한 검은 돛 단적선이 기러기떼 모양으로 요란히 방포하고 따라 오는 것이 보였다.
순신은 손수 한 소리 높이 북을 울렸다. 한산도 속 바다에 숨어 있는 전선에게 출동을 명령하는 것이었다.

5

『둥............』
하는 북소이에 한산도 속바다에 숨어서 기다리던 배들은 일제히 돛을 감았다.
이 영담의 선봉대가 대섬에서 얼마 머지 아니한 곳에 다다랐을 때에는 칠십여 척의 적의 함대는 꼬리를 물고 그 뒤를 따랐다.
순신이 또 한번 북을 울리니 일성 방포가 뒤미쳐 물 속으로부터 솟아 나는 듯이 한바다에 쑥 나섰다.
적의 함대는 불의에 큰 함대가 앞을 막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래어 허둥지둥하여 행렬이 어지러웠다.
이편의 함대는 들입(入)자 모양으로 학익진(학의 날개와 같은 진형)을 벌여 적의 함대를 안아 싸고 노를 빨리 저어 지현자(지현자). 승자(승자)각양 총통을 놓으니 선봉으로 오던 적선 세 척이 깨어져 배에 탔던 적병이 하나 남기지 아니하고 물에 빠져 깨어진 배의 널쪽을 붙들고 부르짖었다.
이것을 보고 적선은 기운이 꺾이어 뱃머리를 돌려 오던 길로 도로 도망하려 하였으나 경작간에 난데 없는 수십척의 배가 고성쪽으로부터 내달아 서까래 같은 화전과 각양 총통과 활을 쏘고. 이것을 피하여 뱃머리를 거제쪽으로 돌리니 소쿠리도 그늘로서 또 난데 없는 수십척의 배가 나타나 역시 서까래 같은 화전을 쏘니적의 함대는 삼면으로 우리 함대에게 싸이어 화전을 맞아 돛에 불이 댕기어 황혼의 하늘에 염염히 타오르니 마치 수없는 불기둥과 같아서 하늘과 바다가 온통 불빛이 되었다. 적의 함대는 완전히 통제를 잃어 행렬이 무너지어 하나씩 둘씩 저마다 갈팡질팡 도망할 길을 찾을 때에 우리 군사는 기운이 백배하여 다투어 나아가 갈팡질팡하는 적선을 잡았다.
타고. 깨어지고. 남은 적선 십여 척이 한산도 앞바다를 빠져 도망하려 하였으나 미륵도에서부터 한산도 끝까지 수백의 불이 앞을 가로막았으니 이것도 필시 이 순신의 병선이리라 하여 거기 다시 뱃머리를 돌려 대섬을 향하고 돌아왔다. 이때에 순신은 짐짓 대섬 앞바다를 비우고 멀리 적선을 애워 싸니 길을 잃은 적선은 한산도 속 바다를 외양으로 터진 바다인 줄만 알고 그리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얼마를 가서 이것이 막다른 골목인 줄을 알고 이 십척의 병선 중에는 장수 협판 좌위문(脇坂左衛門)과 진와 재마윤(眞외在馬允)의 탄 배도 있어서 그들은 용감하게 십척의 적선으로 최후의 대항을 하였다.
그 좁은 한산도 속바다에서 일대 격전이 일어나 포향. 불빛이 하늘에 닿았다.
그러나 마침내 십척 중에 아홉 척은 불타고 혹은 깨어지고. 오직 진와의 배 한척만이 남아 도망하여 진와와 및 그 부하 장졸이 섬으로 올랐으나 그 나머지 장졸은 협판 주장 이하로 다 속 바다의 귀신이 되었다.
진와가 부하 장졸 백여 명을 데리고 물에 오르매 조선군사는 그 배를 불살라 벼렸다. 진와는 길에 올라 자기가 탔던 배가 불붙는 것과 바다 가운데 반쯤 잠긴 자기편 배들이 아직 번쩍번쩍 차마 꺼지지 못하는 듯한 불길을 내임을 보고 문득 자기만 목숨을 보전하여 도망한 것이 부끄러운 생각이 나서 동을 향하여 자기의 임금과 조상의 영을 부르며 통곡하고 그 자리에서 칼을 빼어 배를 갈라 죽었다. 따르던 장졸 중에 이십여 명이나 주장의 뒤를 따라 배를 갈라 죽고 그 나머지는 혹시나 도망할 길이 있나 하고 초생달도 다 넘어간 캄캄한 밤에 수풀 속으로 헤매었다.
이튿날 아침에 도망한 적병의 종적을 수색하던 조선 군사들이 진와 이하 이십여 명이 배를 갈라 죽은 자리를 발견하고 순신에게 보고하매 순신은 땅을 파고 그 시체들을 묻고 술을 부어 적의 충혼을 위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