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 14 (01~05)

1

한산도와 부산 싸움이 있는 후로 각지에는 의병이 일어났다. 이것은 이 수닌의 용기가 패잔한 조선 백성에게 새로운 힘을 넣어 줌이었다.
의병뿐 아니라 관리 중에도 새로운 용기를 얻어 싸우는 이가 생겼다. 예를 들면.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 담해(鄭潭海). 해남 현감(海南縣監) 변 응정(邊應井) 같은 사람이다.
이때에 적군은 이 순신에게 대패하여 도저히 수로로 전라도네 들어 가지 못할 줄을 알았다. 그러나 전라도는 그가 심히 원하는 바였다. 첫째로. 전라도는 물사닝 풍부한 곳이니 많은 군사가 오래 조선에 주둔하려면 조선의 보고인 전라도를 손에 넣어야 할 것은 군략상으로 가장 필요하였다. 둘째로. 조선 칠 도를 다 손에 넣고도 이 순신 한 사람 때문에 전라도에 손을 붙이지 못한다는 것이 적군의 우신에 관계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셋째로. 가장 무섭고 가장 미운 원수인 이 순신의 접촉할 곳을 없이 하기 위하여서도 전라도를 손에 넣는 것은 필요하였다.
이라하여서 적군은 한산도 패전 이래로 육로로 전라도를 공략하는 것으로 중심 문제를 삼았다. 서울로부터 내려 오는 적병들이 언필성 전라도라고 한 것이 이때문이었다. 이에 적군은 경성 이북에 갔던 군사들을 도로 불러서 전라도 공격에 전력을 다한 것이었다.
임진년 칠월 그믐께 적병은 경상 우도(慶尙右道)의 초계(草溪)로부터 안음(安陰). 장수(長水)를 지나 전주(全州)를 치려 하였다.
이때에 김제 군수 정 담해와 해남 현감 변 응정은 감사 이광(李光)에게 일이 급한 것을 말하였으나 이 광은 용인(龍仁)에서 패전한 쓴 경험이 있어 겁을 내어 전주성중을 지킨다 하고 나로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정 담해와 변 응정은 분개하여 수하병 천여 명을 끌고 곰재(곰재)에 목책을 만들고 산길가로 끊어 적군을 막기로 하였다.
과연 수만의 적군이 곰재로 올려 밀었다. 담해와 응정은 용감하게 선두에 서서 군자를 지휘하여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싸웠다. 저편에는 이편보다 수십 갑절되는 군사가 있으나 이편은 높은 곳에 목책을 세우고 숨어서 싸우기 때문에 이편에서 죽은 군사보다 여러 갑절되는 군사를 죽였다.
그러나 종일 싸움에 이편 군사도 거의 다 죽어 이백명 가량 밖에 남지 아니한 때에 적군은 뒤로 물러가는 듯하더니 밤에 샛길로 사방으로 올라 와서 담해의 군사를 완전히 포위하고 항복을 청하였다.
댐해는 단연히 항복을 거절하고 싸움을 계속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칼을 선두에 서서 싸우다가 적의 철환에 맞아 죽었다.
담해가 죽으매 응정이 대신 남은 군사를 호령하여 싸웠으나 그 역시 적의 철환에 맞아 주고 군사들도 담해와 응정의 의게에 감복하여 하나도 아니 남고 다 싸워 죽었다. 곰재에는 시체가 길을 막아 사람이 통행할 수가 없었다.
적장은 군사를 시켜 이편 장졸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 여럿을 만들고 그 위에 목패를 깎아.
『( )』
이라고 써 세웠다.
이튿날 적병은 대거하여 전주성 외에 다다랐다. 적병이 오는 것을 보고 전주 관리들이 달아나려 하나 감사 이광은 선화당에 수어 나가지 못하였다. 이때에 태주 사람 전전적(前典籍) 이 정란(李廷鸞)이 문관복을 입고 성에 들어 가 달아나려는 관리와 백성들을 보고.
『우리가 다 죽을지언정 전주성을 적군에게 내어 주지 못하리라.』
하고 외쳤다.

2

백발이 성성한 이 전적의 정성은 전주 관민의 마음을 감동하여 죽기로써 전주를 지키기로 맹세하였다. 적병도 곰재에서 많은 군사를 잃어 의기가 저항한데다가 전주성이 좀체로 깨어지지 아니할 것을 보고 또 전라도 사람이 다른 도 사람들과 달라 대단히 용감한 것을 저퍼하여 전주성을 버리고 물러갔다.
평안도 순찰사(平安道巡察使) 이원익(李元翼).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貧) 등이 역시 한산도 승전에 힘을 얻어 강변(압록강변이라는 뜻) 포수 아울러 수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으로 오고. 별장(別將) 김응서(金應瑞)는 용강(龍岡).
삼화(三和). 증산(甑山). 강서(江西) 사읍 군사를 거느리고 이십여 둔을 지어 평양 서편에 진을 치고. 수사(水使) 김 억추(金億秋)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하류에 있어 외각의 세를 이루어 서로 응하기로 하였다.
팔월 일일에 이 원익(李元翼)이 주창이 되어 평양(平壤)성 북으로 쳐들어 오다가 적병의 선봉 이십여 명을 쏘아 죽이고 의기 양양하게 평양서에 임박하였으나 적의 대군이 몰려 나오는 것을 보고 이 원익(李元翼) . 이 빈(李貧) 등 경관(서울서 온 벼슬아치)들이 군사를 버리고 달아나이 군사들은 장수를 잃고 흩어졌으나. 오직 강변 포수들이 저희들끼리 싸워 많은 적병을 죽이고는 하나 아니 남고 다 전사하였다.
김응서는 싸움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 곧 군사를 끌고 보통문으로 짓쳐 들어 왔으나 이때에는 이 원익의 군사는 벌써 무너지고 만 때였었다.
김응서는 크게 분개하여 고군 분투하였드나 중과 부적하여 거의 전군을 잃어 버리고 몸을 빼어 도망하였다.
순찰사 이원익의 군사가 패하매 소서행장(小西行長)은 금명간에 평양을 떠나서 의주(의주)를 무찌는다고 호언하고 글을 조선군에 보내어 가로되.
『( ) (양의 무리가 한범을 침이라.)』
평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동안에 각 읍 백성들은 모두 피난짐을 싸놓고 오늘이나 오늘이나 하고 적병이 밀어들어 오기를 무서워하였다.
이때에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수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운을 얻어 병부상서 석성(兵部尙書石星)이 절강(浙江) 사람 심유경(沈惟敬)이란 자를 조선에 보내어 이 기회에 조선과 일본과의 화친을 붙일 계획을 하였다.
심유경(沈惟敬)이란 자는 일본을 다녀 온 일이 있어 일본의 사정을 잘 아노라고 자칭하고 병부상서 석성(石星)에게 자원하여 삼촌설로 능히 일본군을 물리칠 것을 장담하였다.
그때 석성은 될수만 있으면 군사를 움직이지 아니하고 평화 수단으로 일본군을 조선에서 물려 후환을 덜려는 생각을 가졌었다. 왜 그런고 하면 명나라는 당시에 재정이 경갈할 뿐더러 또 내란이 안정되지 아니하여 현군 만리로 조선에 대병을 끌고 오기는 곤란한 사정이 있었디 때문이었다.
이 기회를 타서 일개 부랑자 심유경이 유격 장군(遊擊將軍) 이라는 칭호를 받아 가지고 호위병을 얼마를 데리고 팔월에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는 왕께 뵈올 때에 마치 친구나 대하는 듯이 거만하였고. 영의정 이하로 조신의 대관을 대할 때에는 마치 자기의 수하나 대하는 것같이 거만하였다. 그는 상국 대판의 위품을 드날려 안하무인이었다.
『어떻게 적병을 물리라시오?』
하고. 물으면 그는 유쾌한 듯이 손으로 가슴을 가리키며.
『이 속에 다 계책이 있으니 너희는 알 배 아니다.』
하는 듯한 모양을 보였다.

3

심유경은 순안(順安)에 이르러 편지를 닦아 평양의 소서행장(小西行長)에게 보내었다. 그 글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었다.
『( )』
그 뜻은.
『내 황제의 뜻을 받아 너희에게 묻노니. 조선이 일본에 무슨 잘못이 있건대 일본이 함부로 군사를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유경은 이 편지를 보에 싸서 자기가 데리고 온 하인한 사람의 등에 지우고 말 태워 곧 보통문으로 들어가라 하였다. 이때에 적병은 노상 행인도 막 잡아 죽이는 때라 이것을 심히 위태하게 여겼으나 유경은 웃으며.
『상관없다. 어느 놈이 내 편지 가지고 가는 하인을 건드릴까 보냐.』
하고 뽐내었다.
소서행장(小西行長)은 심유경의 편지를 보고 곧 만나기를 허하였다. 그는 한산도의 대패전을 보고는 더욱 싸울 뜻이 없어 핑계만 있으면. 풍신수길의 마음만 만족시킬 수가 있으면 화친할 생각이 간절하였던 까닭에 심유경의 편지를 반갑게 받았던 것이었다.
유경은 행장의 회답을 받고 곧 평양을 향하여 떠나려 하였다. 사람들은 위태하다는 말로 많이 만류하였으나. 유경은 거만한 태도로.
『제가 나를 어찌한단 말이냐?』
하고 웃었다.
유경은 가정 삼사인만을 데리고 말을 타고 태연하게 평양을 향하였다. 조선 군사들과 관리들은 멀리 그의 뒤를 따라서 어떻게 되는 양을 구경하였고 우리 사람들은 대흥산(大興山)에 올라 가 바라보고 있었다.
평양에 있는 소서행장은 대마도주 평의지(對馬島主.平義智). 중 현소(玄蘇) 등을 데리고 다수한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성 북 십리허 강복산(降福山) 아래까지 나와 심유경의 일행을 맞았다. 만장과 같은 오색 깃발을 날리고 군사들은 창과 칼을 들어 그 찬란하고 위엄 있음이 비길 데가 없었다. 창검이 햇빛에 번쩍거리는 것이 마치 눈과 같았다.
심유경이 말에서 내리는 많은 군사가 그의 일행을 에워싸는 것이 마치 심유경 일행을 꼭 붙드는 것과 같았다.
낮이 조그 나서 평양성에 들어간 심유경은 해가 저물어서 여러 장졸의 전송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돌아 나왔다.
이튿날 소서행장은 심유경에게 글을 보내어. 이제 진중에 찾아온 뜻을 감사하는 인사를 하고 밤새에 문안을 한 후에.
『( )』
라 하는 구절을 썼다. 그뜻은.
『 대감이 창검 속에서도 낯빛이 변치 아니하니 비록 일본 사람이라도 게서 더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보고 심유경이 더욱 자대하여.
『( )』
라 하고 뽐내었다.
그리고 심유경의 말에 의하건대.
『내 황제(명나라)께 여쭈어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니 오십일만 기다리되 일본군은 평양 서북 십리 밖에 나와 약탈을 말고 조선군은 십리 이내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지 말기로 하였다.』
하여 평양서에서 십리 되는 곳에 나무를 깎아 세워 금표를 삼고 갔다.
심유경의 하는 일은 모두 황당하여 명나라를 의지하려는 마음이 많은 조선 대관들 중에도 의심을 가지고 보았다. 더구나 류성룡(柳成龍)은 이 믿을 수 없는 작자 심유경이 반드시 무슨 일을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하여 왕께도 그의 말을 믿지 말고 경계하기를 주청하였다.

4

강원도 조방장(江原道助防將) 원호(元豪)는 여주 구미포(麗州龜尾浦)에서 적병을 깨뜨려 여주. 이천(利川) 양근(楊根). 지평(地坪)의 백성을 적병의 손에서 구하였고. 훈련 봉사(訓練奉事) 군 응주(權應주) 정대임(鄭大任) 등은 향병으로 영천(永川)의 적병을 깨뜨려 신녕(新寧). 의성(疑城). 안동(安東) 등 여러 고을을 안보하였고.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박진(朴晋)은 군기사화포장(軍器寺火疱匠) 이 장손(李長孫)이 발명한 비격잔천뢰(飛擊震天雷)라는 것으로 적병의 큰 근거지가 된 경주(慶州)를 깨뜨렸다.
비격진천뢰라는 무기는 조선이나 중국에 예로부터 없는 것인데 군기사 화포장 이 장손이 처음으로 발명한 것이었다.
대완구로 써면 진천뢰는 탄환이 오륙보를 날아 가서 떨어졌다가 그 속에서 불이 발하여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터져 철편이 별같이 날아 한방에 삼십여 명이 즉사하고. 맞지 아니한 자도 땅에 엎더져 정신을 잃고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적병은 이거을 가장 무서워하여 귀신의 조화라고 하였다.
전라도에서는 김천일(金千鎰).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같은 이가 의병장을 유명하였고. 경상도에서는 현풍(玄風)에 곽재우(郭再祐). 고령(高嶺)에 김민(金민). 합천(陜川)에 정인홍(鄭仁弘) 예안(예안)에 김해(金海). 유종개(柳宗介). 초계(草溪)에 이 대기(李大期). 군위(軍威)에 장사진(張士珍) 등이 다 의병장으로 싸웠다. 그주에도 현풍 곽재우는 가장 재략이 있어 그가 솔나루( )루 지키매 적병이 감히 의녕(宜寧) 지경을 범하지 못하였다.
충청도에는 계룡산 중 영규(靈圭)가 승병(僧兵)을 거느리고 용감히 싸웠고. 조헌(趙憲). 김홍민(金弘敏)이 산겸(李山謙). 박춘무(朴春茂). 충주(忠州)에 조덕공(趙德恭). 조웅(趙雄). 청주(淸州)에 이봉(李逢) 같은 사람이 다 의병으로 싸워 죽었으며.
경기도에는 우성전(禹性傳). 정숙하(鄭淑夏). 수원(水原)에 최흘(최흘).
고양(高揚)에 이 노(李魯). 이산휘(李山輝). 남언경(南彦經). 김탁(金琢). 유대진(兪大進). 이 질(李질). 홍계남(洪季男). 왕옥(王玉) 같은 의병장이 있었다.
이때에 사명당(四溟堂)은 금강산 표훈사(金剛山表訓寺)에 있었다. 적병이 산중에 들어오매 다른 중들은 다겁을 집어 먹고 달아나고 오직 사명당만은 눈도 거들떠 보지 아니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적병들은 감히 사명당을 범하지 못하고 그중에는 합장하고 가는 이도 있었다. 이때에 류 성룡(柳成龍)이 안주(安州)에 있어서 사방에 글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를 청한 글이 오니 사명당은 법당에 중들을 모아 놓고 부처 앞에서 그 글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중들이 모두 사명당의 정성에 감동하여 나아가 죽기로써 싸우기를 맹세하였다.
이에 사명당은 금강산 여러 절고 이웃 고을 여러 큰 절의 중을 모아 천여 명 승병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하였다.
평양에서는 고충경(高忠卿)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모아 자주 평양에는 고충경(高忠卿)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모아 자주 평양의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오십 일로 기약을 삼고 명나라로 돌아간 후 오십 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것을 보고 소서행장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심유경의 언약을 지켜 오십 일 동안에는 평양성중에 군중에 군사를 거두어 동하지 아니하였으나 십 일월이 되매.
『( )』
이라 하여 의주를 공격할 것을 선언하고. 또 평양에서 적군에게 잡혔다가 도망하여 돌아 온 사람에게 들으면. 평양의 적군은 성을 공격할 군기를 많이 준비한다고 하였다.
이 소문은 의주의 조정을 심히 무섭게 하였다.

5

십 이월에 명나라에서는 병부우 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으로 경략사(經略使)를 삼고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유황상(劉黃喪). 주사(주사) 원황(袁黃)으로 찬회군무(贊획 군무)를 삼고. 주요 동제독(駐遼東醍督)이여송(李如頌)으로 대장을 삼아 삼영장이 여백.(이 여백). 장세작(장세작). 양원(양원)과 남장(男裝). 낙상지(落尙志). 오 유충(吳惟忠). 왕필적(王必迪)등을 부하로 하여 사 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심유경(沈惟敬)도 뒤따라 와서의 주성중에서 대장이 여송과 무슨 밀담을 하고 한 걸음 앞서서 평양을 향하였다.
이 여송의 대군이 안주(安州)에 이르렀을 때에 류 성룡은 접대관으로 여송에게 면회를 청하였다.
여송은 동헌에 앉아 류 성룡을 맞아 의자에 앉으라 하여 마주 앉았다. 여송은 심유경과 같이 오만무례하지는 아니하였다.
류 성룡은 여송에게 원로에 온 수고를 위문하고 대병으로 구원하러 온 것을 감사한 후에 소매로부터 평양 지도를 내어 놓고 손으로 형세를 가리키며 어디로 쳐들어가야 할 것을 말하였다.
여송은 성룡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필로 성룡의 가리키는 곳에 점을 쳤다. 그리고 성룡을 안심시키는 듯이.
『염려할 것 없어. 저는 조총을 믿지마는 우리는 대포가 있거든 대포는 쏘면 오륙리를 가니 제가 당하겠나.』
하고 조금도 염려할 것 없다는 듯이 웃었다. 성룡은 명장 조승훈(조승훈)이 패한 것을 들어 적군이 결코 경제적이 아닌 것을 주의하였으나 여송은 다 우습게 여기는 모양 같았다.
성룡이 여송에게 작별하고 물러나오려 할 때에 여송은 부채를 내어.
『(.....
)』
이라고 써서 성룡에게 주었다.
안주 성중은 명나라 군사로 찼다. 군율도 엄숙하여 아직까지는 민간에 작페하는 일은 없었다.
이튿날 여송은 부총병(副總兵) 사대수(奢 大收)를 먼저 순안으로 보내었다. 사 대수는 평양의 소서행장에게 군사를 보내었다. 사 대수는 평양의 소서행장에게 군사를 보내어( )라는 뜻을 보하였다. 곧 명나라에서 화친을 허하였다는 것이다.
심유경은 이렇게 명나라를 움직여 화친을 허하게까지한 것이 다 자기의 공인 듯이 평양의 소서행장에게 자기가 왔다는 말을 전하였다.
소서행장도 어서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차이라 심유경이 순안에 왔다는 기별을 듣고 곧 관사 수십 명을 거느린 소장 평호관(平好官)을 영접사로 보낼 때에 이러한 한시 한 수를 지어 보내었다
『( )』
명 나라 총병(總兵) 사대수(査大收)는 평호관을 거짓 환영하는 체하고 술을 많이 먹여 취한 뒤에 복병으로 하여금 평호관의 군사를 다 잡아 죽이게 하고 평호관을 사로잡아 평양성에 있는 소서행장의 군사의 비밀을 말하라고 악형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매 마침내 죽여 버렸다.
평호관의 군사 세 명이 도륙을 면하고 평양으로 도망하여 평 호관이명병에게 잡혀 죽은 말을 전하였다. 이보고를 들은 소서행장은 심유경의 흉계에 넘어간 것을 깨닫고 분노하여 곧 성 지킬 준비를 하였다. 그는 반드시 명병이 크게 쳐 올 것을 짐작한 것이었다. 평양 성중은 밤새도록 물끓듯 하였다.